ChangJo BBS


작성자
정재상
날짜
11/02/23 1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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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40
제 목
 도서 : 칼빈과 이냐시오의 영성 (이경용 목사님)
 
 



대한기독교서회-칼빈과 이냐시오의 영성 이경용목사


1. 21세기에 영성이 고조되는 이유-구름기둥과 영성

1945년 1월 22일 오전 10시. 다이나마이트의 거대한 굉음과 함께 제5호 화장터의 굴뚝이 주저 앉아버렸다. 그 다음 날, “노동이 자유를 만든다”(Arbeit macht frei)는 구호가 걸려있는 아우슈비츠에 소련의 붉은 군대가 들이닥쳤다. 그러나 눈 덮인 자갈 외에는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 며칠 전만 해도 다섯 개의 굴뚝에선 날마다 뿌연 연기가 하늘로 치 솟아 올랐다 바람과 함께 사라져버리곤 했다. 바로 홀로코스트의 현장인 아우슈비츠에 있는 유대인 소각로 굴뚝의 연기들이었다. 홀로코스트(holocaust,번제)는 불행, 대재난, 완전히 불태운다는 뜻의 히브리어 올라(עלה)에서 유래하였다. 노아는 홍수 후에 정결한 제물을 골라 번제를 드렸다.(창8:20) 제물을 불태워 하나님께 바치는 제사의식인 홀로코스트는 제2차 세계대전 후, 나치에 의한 대규모 유태인 학살을 의미하는 고유명사로 불리어졌다.

21세기에 들어서며 영성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 이런 현상은 전 세계적이며 기독교뿐 아니라 타종교에서도 발견된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마이클 다우니(M. Downey)는 실용주의, 끝없는 불안감에 대한 반발심리, 유대인 대학살과 히로시마 원폭 투하 그리고 베트남 전쟁 등을 꼽는다. 이러한 충격적인 사건들로 인해 외적질서와 권위가 붕괴되면서 사람들은 인간의 내면세계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즉, 영성이란 전쟁과 죽음이라는 황량한 자리에서 고개를 들고 나온,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서 시작된 것이다. 동시에 전자통신의 발달로 인한 디지털 시대의 스피드에 대한 거부감도 영성이 싹트는 요인이 된다. 과학기술의 발달로 삶은 편리해 졌지만, 영혼이 편안해 진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한국교회도 영성에 관심이 매우 높다. 그 주된 이유는 교회 성장의 정체, 지도자들의 영성의 빈곤, 부유해진 경제생활로도 채워지지 않는 근원적인 영적목마름, 인터넷과 스마트폰의 도래로 인한 피상성에 대한 반작용 등이 교회로 하여금 영성에 관심을 갖게 하는 요인이다. 목회전문지인『목회와 신학』(2009.7월호)은 목회자, 신학교 교수, 신학생을 대상으로 ‘10년 후 한국교회를 생각할 때 목회자가 가장 힘써야 할 덕목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하였다. 응답 결과는 ‘개인 영성의 회복’이 67%였다. 이 시대는 소리는 없지만 거대한 파도처럼 영성에 대한 요구가 점점 높아가고 있다. 이제 21세기 인간들과 한국교회는 소각로의 연기기둥이 아니라, 또 다른 기둥 즉, 쉐키나(Schechina)의 구름기둥을 기다리고 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영성에 대한 이야기가 시작된다.

2.칼빈과 이냐시오의 만남의 가능성과 영성형성의 4단계

전통적으로 개혁교회 신앙은 칼빈(J Calvin,1509-1564)의 신학에 많이 의존한다. 그동안 한국교회는 주로 칼빈을 교리신학과 조직신학 측면에서 많이 다루었다. 그 결과 한국교회가 교리라는 뼈대는 든든하지만 영적으로는 건조한 면도 없지 않다. 칼빈을 영성이라는 관점에서 살펴보는 것은 매우 큰 의미가 있다. 영성이란 인간적인 것과 세월이 주는 각질(角質)을 벗겨내는 일이다. 따라서 칼빈을 영성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교리라는 든든한 뼈대에 영성이라는 생기를 불어넣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칼빈의 『기독교 강요』를 중심으로 칼빈의 영성 형성 배경과 특성을 살펴보고자 한다.

동시에 이냐시오(St. Ignatius,1491-1556)의 삶과 영성도 함께 살펴보고자 한다. 이냐시오는 칼빈과 16세기 동시대 인물로서 로마 가톨릭의 종교개혁을 주도했다. 실제로 두 사람은 1528년 파리에서 정통신학의 요새인 몽테규대학에서 함께 공부하였다. 물론 약간의 시차가 있어서 직접 만나지는 못했지만, 교회역사가 필립 샤프는 “16세기 종교운동의 두 가지 상반되는 조류를 대표하는 두 인물이 같은 지붕 아래, 같은 책상에서 공부하는 일이 일어날 뻔하였다.”고 만남의 가능성을 말한다.

개혁교회와 가톨릭교회라는 전혀 상반된 교회의 지도자가 만날 수 있는 가능성은 무엇인가. 그 접촉점이 있다면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영광”이다. 칼빈이 전 생애를 통해 지향했던 것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Soli Deo Gloria)이다. 이냐시오의 생애 역시 ‘보다 큰 하나님의 영광’(Ad Majorem Dei Gloriam)으로 요약된다.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동일한 명제는 두 사람이 만날 수 있는 강력한 접촉점임에 틀림이 없다.

본고에서는 칼빈과 이냐시오의 영성을 에벌린 언더힐(Evelyn Underhill)의 자아의 자각, 정화, 조명, 일치라는 네 구조로 살펴보겠다. ‘자아에 대한 자각’(the awakening of the self)은 대개 회심으로 나타난다. ‘자아에 대한 정화’(the purification of the self)는 회심 뒤에 따라오는 자연스러운 단계로 정화는 주로 참회로 나타난다. 회심이 일회적이라면 정화는 지속적인 과정이다. ‘자아에 대한 조명의 단계’(the illumination of the self)는 정화기 마지막에 있던 어둠이 사라지고 영적 자유와 밝아짐을 느낀다. 조명의 핵심은 자기중심으로부터 하나님 중심으로 의식이 고양되며, 하나님의 임재를 다양하게 느끼고 경험한다. ‘일치기’(the unitive life)의 일반적 특징은 관상적 체험이다. 탱퀴어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관상이란 "우리를 사로잡는 성령의 선물과 특별한 은총에 의해, 하나님과 그분의 세상에 우리가 완전히 빨려들어 가는 피동적인 현상"이라고 말한다. 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살고 있음을 느끼고 자각하는 신비로운 단계이다.

3. 칼빈과 이냐시오의 영성의 배경

우리는 흔히 칼빈을 27세에 기독교강요를 쓴 천재, 종교개혁을 완수한 강인한 용사로 생각한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칼빈은 가끔 자신을 가리켜 ‘보통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마치 킹 크랩(대게)의 겉껍질은 단단하지만 그 속살은 한 없이 부드러운 것처럼, 칼빈도 강인함이 있지만 동시에 인간적인 약함과 눈물이 있었다. 이렇게 ‘영웅 칼빈’이 아니라 ‘인간 칼빈’의 모습을 살펴볼 때, 그의 영성을 보다 잘 이해할 수 있다.
칼빈은 1509년 7월 10일 프랑스 노용(Noyon)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제라르 코벵은 입지전적인 인물로 뱃사공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노용 주교청의 비서와 노용성당의 사무장이 되었다. 한 마디로 신분 상승에 성공한 것이다. 이런 아버지의 후견으로 칼빈은 유년시절부터 귀족의 자녀들과 교제하며 고등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오랜 세월 후에 아버지는 출교된 상태에서 죽음을 맞이하였고, 신부인 형 샤를(Charles)도 종교개혁을 지지하다가 출교당한 채 세상을 떠났다. 이런 일련의 아픔은 칼빈이 로마 가톨릭에 등을 돌리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칼빈의 영성 형성 배경은 일차적으로 ‘근대적 경건주의’(Devotio Moderna)와 기독교 인문주의의 영향이다. 근대적 경건운동은 15-16세기에 번성한 영성의 한 흐름으로 에라스무스, 토마스 아 켐피스, 칼빈, 이냐시오 등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이 운동은 게르하르트 그로테(Gerhard Groote)가 시작하였는데, 그는 ‘공동생활 형제단’을 만들고 명상적이면서도 활동적인 제자들을 모았다. 그들은 오랜 침묵, 금식, 철야, 묵상기도를 하며 수도사처럼 엄격한 통제 아래서 공동체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동시에 사도들처럼 설교하면서 교회를 개혁하려고 노력하였다.

칼빈이 근대경건 운동으로부터 받은 영향을 정확히 기술하기란 어렵지만, 특히 두 사람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토마스 아 캠피스의 “그리스도를 본 받아”와 칼빈의 영성을 비교해 보면 자기부인과 십자가를 진다는 점에서는 상당한 유사성이 있다. 또한 사람은 에라스무스이다. 칼빈은 에라스무스의 ‘세상 속의 수도사’ 개념을 수용한다. 칼빈은 ‘세상으로부터의 구별’이 수도원 제도에 의해 보장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인격적인 선택과 결단으로 본다. 따라서 칼빈의 영성은 은둔적인 수도원과 달리 세상에서 하나님을 위한 봉사의 영성으로 나타난다. 참된 영성이란 기독인의 완성을 위해 세상으로부터 한 걸음 물러서서 묵상하는 후퇴와 세상 개혁과 하나님 영광을 위한 세상으로 나아가 참여하고 변혁시키는 양 방향성을 갖는다.

이냐시오는 1491년 스페인 로욜라(Loyola)에서 바스크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로욜라 가문은 대대로 스페인 국왕에 충성하는 기사의 가문이었다. 그의 꿈은 기사로서 큰 무공을 세워 왕가의 공주에게 인정받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꿈은 프랑스군과의 전투에서 오른쪽 무릎에 큰 부상을 입고 깨어지고 말았다. 약 6개월간 투병 생활을 하는 동안, 이냐시오는『그리스도전』과 『성인열전』(聖人列傳)을 읽으며 회심을 경험하였다. 전쟁 부상으로 인해, 이냐시오의 세속적인 꿈은 깨어지고, 대신 그리스도를 따르기로 결심하였다.

건강이 회복된 후 이냐시오는 만레사에서 아주 중요한 경험을 하였는데, 곧 “까르도넬 강가에서의 성삼위 하나님의 현시체험”이다. 이 체험에 대해 이냐시오는 “만사가 그에게 새로워 보일 만큼 강렬한 조명이 비쳐왔다”고 고백한다. 그는 이 체험으로 하나님의 현존에 대한 확신을 얻었고, 이 순간에 받은 은혜와 깨달음이 그의 전 생애에 받은 것보다 크다고 고백하였다. 그 후 이냐시오는 예루살렘 성지순례를 떠났다.

그 후 이냐시오는 선교 활동과 설교를 공식적으로 하려고 신학공부를 위해 파리로 갔다. 파리에서 이냐시오와 칼빈은 같은 몽테규대학에서 공부하였고, 근대경건 운동의 영향을 받았다. 1534년 8월 15일에 이냐시오의 일곱 친구들이 몽마르트 언덕에 있는 한 성당에서 하나님의 영광과 사람들의 영혼 구원을 위해 헌신을 결의하였다. 이것을 ‘몽마르트의 서원’이라 하는데, 후에 예수회로 발전하였다.

근대적 경건운동은 이냐시오에게도 큰 영향을 주었다. 근대경건운동의 발생 동기는 당시 교회 전례의 쇠퇴와 성직자들의 영적, 지적인 수준의 저하 그리고 사람들의 내면세계를 채워주지 못하는 영성의 메마름 때문이었다. 그에 대한 반동으로 그리스도의 생애와 수난에 대한 깊은 묵상과 새로운 영성생활을 추구하는 움직임이 일어난 것이다. 이 운동은 내적 회개, 뜨거운 기도, 엄격한 영성 훈련과 자기 부정을 강조한 영성운동이다.

이 운동의 중요한 대표자가 토마스 아 켐피스이다. 그의『그리스도를 본받아』에는 중세 영성의 가장 중요한 흐름과 주제들이 합류되어 있다. 그 중요 주제는 그리스도를 모방하는 것이다. 캠피스는 개인적 경건, 성령의 내적 생활 그리고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연합을 강조한다. 켐피스의 영성은 본질적으로 금욕적이며 헌신의 개인화와 세상에 대한 무관심의 경향이 있다. 파리 유학생활 동안 이냐시오는 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에 심취한 것으로 보인다. 이냐시오는 에라스무스의 작품에는 늘 거리를 둔 반면, 켐피스를 좋아했다. 비슷한 시기에 파리에서 유학하며 근대경건 운동의 영향을 받았지만, 그들이 선호한 사람은 달랐다. 칼빈이 친(親) 에라스무스적이라면 이냐시오는 친(親) 토마스 아 켐피스적이었다. 이것은 두 사람의 성향이 다름을 보여주는 것이며, 그 결과 그들이 추구했던 영성도 조금 다르게 나타난다.


4. 칼빈의 영성

칼빈의 영성을 자아의 자각, 정화, 조명, 일치라는 관점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칼빈의 자아에 대한 자각은 기독교강요 제1권 1장에서 "하나님에 관한 지식과 우리 자신에 대한 지식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말에서 명확히 볼 수 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인간을 아는 지식은 깊은 연관성을 갖고 있다. 인간은 하나님을 아는 만큼 자기를 알 수 있고, 동시에 자기를 아는 만큼 하나님을 알 수 있다.
칼빈은 인간을 ‘창조된 인간’과 ‘타락한 인간’ 그리고 ‘중생한 인간’으로 구분한다. 칼빈은 인간론의 문제를 이렇게 제기한다. “우리가 이미 말한 대로 우리 자신에 대한 인식 없이는 하나님에 대한 명백하고 완전한 지식을 가질 수 없다. 우리 자신에 대한 지식은 두 가지이다. 즉, 인간이 처음 창조되었을 때 우리의 상태가 어떠했으며, 아담의 타락 이후 인간의 상태가 어떻게 되었는가 하는 것을 아는 것이다.”(기독교강요,Ⅰ,ⅹⅴ,1)
타락한 인간 이해는 필연적으로 회심의 문제로 연결된다. 회심을 해야만 하나님을 알 수 있고, 동시에 자기 인식도 가능한 것이다. 칼빈은 자신의 회심을 이렇게 고백한다. “하나님은 신비로운 섭리로 나의 인생행로를 바꾸어 놓으셨다. 처음에 나는 너무나 고질적으로 교황주의의 미신에 열성적이어서 그 깊은 진흙의 수렁에서 쉽게 벗어 날 수 없었다. 하나님께서는 갑작스런 회심으로 나의 마음을 복종시키셨고 온순하게 하셨다.”(시편주석 서문, 160-161) 칼빈 회심의 특징은 “갑작스러운 회심”이다. ‘갑작스러운’이라는 형용사는 매우 강력한 감성적이며 감각적인 체험임을 암시한다. 칼빈의 회심은 오랜 영적 잠복기를 가진 후 하나님의 강력하며 갑작스러운 개입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다.

둘째, 자아에 대한 정화로, 회심을 경험한 사람은 자연스럽게 ‘정화의 단계’로 나아간다. 회심이 일회적이라면 정화는 지속적인 과정으로 그 본질은 자아의 단순화이다. 대개 정화는 회개로 나타난다. 죄는 인간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게 하며, 영적 성장과 성화를 가로막는다. 따라서 회개로 영혼이 정화될 때 성화가 이루어진다. 칼빈은 회개는 “하나님을 순수하고 진지하게 두려워하기 때문에 생기는 전향이며, 회개의 요소는 옛 사람과 육을 죽이는 것으로 성령에 의한 삶으로 성립된다.”(기독교강요,Ⅲ, ⅲ, 5) 고 말한다.
회개가 하나님과 나 사이의 정화라면, ‘자기부정’(self-denial)은 자기와 또 다른 자아 사이에서 발생하는 정화이다. 회개가 죄를 씻는 것이라면, 자기부정은 죄로 인해 타락한 인간의 본성과 자아를 부인함으로 이루는 정화이다. 죄가 하나님과 인간을 가로막는 장애물인 것처럼, 타락한 인간의 자아 역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장애물이 된다. 타락한 인간의 자아는 흔히 자만, 교만, 탐욕, 방탕, 나약, 욕심, 이기심 등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자아는 하나님보다는 자기 자신의 유익과 영광만 추구한다. 그러므로 타락한 인간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는 자기 자아에 대한 철저한 부정이 필요하다. 타락한 인간의 본성을 치료하는 가장 좋은 치료제가 바로 자기부정이다.
자기부정이 내적 문제라면, ‘십자가를 지는 것’은 실제 상황에서 그리스도를 닮아감으로 이루는 정화이다. 칼빈은 십자가를 지는 것을 자기부정의 일부로 본다. 기독교강요 제3권 7장의 제목은“그리스도인의 생활의 핵심: 자기 부정”이며, 8장의 제목은“십자가를 지는 것: 자기 부정의 일부”이다. 제목에서 보듯이 십자가를 지는 일과 자기부정은 깊은 연관성이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에게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으라”하셨다. 이 말씀처럼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길은 자기부인과 더불어 자기 십자가를 실제로 지는 것이다. 이것은 내연(內燃 )과 외연(外延)의 관계로, 자기부정이 내면적인 것이라면 십자가를 지는 것은 외면적이고 실제적인 것이다.
‘영생(천국)에 대한 묵상’ 역시 현세상의 집착에 대한 분리(detachment)라는 점에서 정화의 기능이 있다. 칼빈은 이 세상과 천국에 대해서 “참으로 다음 두 입장 사이에는 중간지대는 없다. 즉 세상을 무가치하게 보든지, 아니면 세상을 무절제하게 사랑하든지 양자택일해야 한다”(기독교강요,Ⅲ, ⅸ,2)라고 강조한다. 우리에게 주어진 선택권은 현세에 대한 선택이냐 또는 천국에 대한 선택이냐 둘 중에 하나밖에 없다는 것이다. 칼빈이 이처럼 세상에 대한 애착을 거부하는 것은 ‘종말론적 영성’으로 나타난다. 우리가 현세상의 삶을 천국의 영광을 준비하는 과정, 즉 ‘나그네 영성’(벧전2:11)으로 이해하는 만큼 영혼은 정화되어 간다.

셋째, 자아에 대한 조명은 성경의 안내와 성령의 조명으로 나타난다. 인간이 자기 노력으로 아무리 정화하려고 한계가 있다. 이때 인간의 한계를 뛰어 넘게하는 것이 바로 성경과 성령의 조명이다. 칼빈은 성경을 안경에 비유한다. “...안경을 쓰면 똑똑하게 읽어 내려갈 수 있을 것이다. 성경은 이처럼 하나님에 대한 혼란한 지식을 바로잡고 참 하나님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기독교강요,Ⅰ,ⅵ,1) 인간은 성경이라는 안경을 쓸 때, 비로소 하나님과 자기를 바르게 보게 된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안경을 써도 빛이 없다면 사물을 볼 수없는 것처럼, 식별(識別)의 영인 성령이 영의 눈을 띄워주지 않으면 곤란하다. 성령은 천국 비밀과 자아의 실상을 열어주는 밝은 빛이요 통찰력이다. 성령의 조명을 칼빈은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의 영이 우리를 이끌어주지 않으면, 우리는 그리스도께로 갈 수 없다. 우리의 영혼이 성령의 조명을 받을 때, 날카로운 시력을 얻어 찬란한 하늘의 비밀을 보게 된다. 또한 우리의 지성과 마음은 높이 들려 우리의 이해력은 초월의 경지에 이른다. 인간적인 이해력이 성령의 빛으로 조명 받을 때, 하나님 나라에 속한 일들을 맛보기 시작한다.”(기독교강요,Ⅲ,ⅱ,34)

넷째, 하나님과의 연합은 ‘그리스도와 신비한 연합’과 ‘성례를 통한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나타난다. 칼빈은 하나님과 인간의 직접적인 연합을 언급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절대 타자(他者)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인간과 연합하는 길은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가능하다. 하나님이 인성(人性)을 입으신 일은 역사적이고 인격적인 현실이다. 그리스도의 인성을 입으신 이유는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의 몸을 취해서 자기 몸을 만드시고, 우리의 살로 자기의 살을, 우리의 뼈로 자기의 뼈를 만들어 우리와 하나가 되게 하셨다”(기독교강요, Ⅱ, ⅻ, 2)고 말한다. 즉, 그리스도는 자신의 중보 사역을 통하여 하나님과 인간이 그리스도 안에서 연합되게 하신다. 그리스도와 신자의 연합은 “그리스도를 옷 입는 것”과 “그리스도에게 접붙임을 받는 것”으로 표현된다.
신자들이 그리스도와 하나되는 또 다른 길은 ‘성례전을 통한 연합’이다. 성례전(세례와 성만찬)의 복음적인 의미는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몸과 신비적인 연합 상태에 있다는 것이다. 성례전을 통한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영적인 신비이므로 이러한 특별한 신비를 가시적으로 알려주려고 성례전을 지정하셨다. 성례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결합된 표식이다. 칼빈은 세례를 이렇게 정의한다. “세례는 그리스도에게 접붙임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되기 위해서 교회라는 공동체에 가입되는 입문(入門)의 표징이다.”(기독교강요,Ⅳ,ⅹⅴ,1) 세례는 그리스도에게 접붙여지며, 그리스도로 옷 입는 것이다.
칼빈의 성찬 이해는 ‘하나님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 초대하시고 그에게 참여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은밀한 연합의 신비를 인간은 이해할 수 없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인간의 연약한 능력에 가장 적합한 가시적인 표징으로 그 신비의 형상을 보여 주신 표징이 바로 떡과 포도주이다.’(기독교강요,Ⅳ, ⅹⅶ, 1) 따라서 성만찬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결합된 상징인 동시에 보증이다. 성만찬은 그리스도와 우리의 신비로운 연합을 가시적인 표시이다. 이것을 가능케 하는 분은 성령으로 “성령은 우리의 지성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 곧 공간적으로 떨어져 있는 것도 결합시키는 분”(기독교강요,Ⅳ, ⅹⅶ, 10)이다.

5.이냐시오의 영성

첫째, 이냐시오의 자아에 대한 자각은 ‘인간의 피조성 인식’과 ‘이냐시오의 회심’으로 나타난다. 이냐시오는 인간이 참된 영적 자유를 누리려면 자기의 실존적 상황을 바르게 인식해야 한다고 본다. 인간들은 하나님을 상대화시키고 오히려 피조물을 절대화시키는 경향이 있다. 인간의 근본적인 불행은 여기에서 시작된다. 이냐시오는 이러한 인간의 유혹에 대해 처방을 『영신수련』의 “원리와 기초”에서 “사람은 우리 주 천주를 찬미하고 공경하고 그에게 봉사하며, 또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 영혼을 구하기 위하여 조성된 것이다.”(영신수련,23)라고 말한다. 즉 인간이란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명확한 인식으로부터 영신수련을 시작한다. 피조물 인식으로부터 자아에 대한 자각이 시작되는 것이다.
이냐시오는 전쟁에서 부상당하여 죽음의 위기를 맛보았다. 그 후 회복되면서 병상에서『그리스도전』과 『성인열전』을 읽고 묵상하는 가운데 속죄의 필요성을 깨닫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지난날을 더욱 진지하게 반성하고 속죄해야겠다는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급기야는 성인들을 본받겠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구체적인 상황 같은 것은 거의 생각지 않았으나, 성인들이 한 것처럼 하나님의 은총에 따라 행동하겠다고 서원했다.”(이냐시오 자서전,9) 이러한 속죄와 회심으로부터 이냐시오의 영성은 시작되었다.

둘째, 이냐시오의 자아에 대한 정화는 ‘죄 묵상과 양심 성찰’, ‘불편심(Indifferince)과 금욕’, ‘영적 어두움과 영신 식별’로 나타난다. 이냐시오는 자아가 정화하려면 철저히 죄를 묵상하여 죄를 미워해야 한다고 한다. 죄를 미워하는 만큼 죄를 멀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영신수련 첫 주간에 원죄, 개인의 죄, 사회와 역사의 죄를 묵상하게 한다. 특히 지옥을 묵상할 때 오감을 사용하여 지옥의 실재를 강하게 느끼게 한다. 그 이유는 죄와 지옥이 무서운 만큼 죄짓기를 거부함으로 정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불편심(不偏心)은 죄로 인해 한쪽으로 치우쳐진 마음을 가운데로 잡는 훈련이다. 괘종시계추가 한 쪽에 치우쳐 있다면, 그 반대쪽으로 끌어당겼다가 놓아야 가운데로 간다. 죄란 과녁에서 빗나간 편향성(偏向性)으로 그 결과가 집착이다. 이렇게 죄로 인해 욕심에 치우친 마음을 정반대의 방향으로 끌고 가려면 육체가 바라는 욕심과 정반대로 소원을 하나님께 기도드리는 것이다. 예컨대, 부자보다는 가난을 장수보다는 단명을 구하는 것이다. 이런 기도 훈련은 욕심을 정화시키는 힘이 있다.
회심 후 영혼이 정화되는 과정에서 ‘영적 어두움’의 단계가 있다. 영적 어둠이란 재난, 강렬한 고립감, 우울증 같은 요인으로 인해 심각한 정신적 불안 상태에 빠지는 시기이다. 영적 어두움이 임하면, 영성의 메마름을 강하게 느끼며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신뢰보다는 고통과 갈등을 겪는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런 영적 어둠이란 고통 때문에 인간적인 방어의식이 무너지고, 영적 식별의 지혜를 얻으며, 나아가 하나님의 은총만 의지하게 된다. 이로 인해 영적 정화가 일어난다. 어둠이 임할 때는 이것이 하나님이 주신 것인지 사탄의 궤계인지 식별해야 한다. 이런 것을 영식별이라 한다.

셋째, 자아에 대한 조명은 그리스도의 생애 관상으로 나타난다. 조명기에 이른 모든 영혼의 일차적 목표는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것”이다. 예수님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 8:12) 말씀하셨다. 예수님을 따르려면, 그리스도의 생애를 관상해야한다. 이를 위하여 이냐시오는 영신수련의 둘째 주, 셋째 주 그리고 넷째 주에서 그리스도의 역사적 생애와 수난, 죽음 그리고 부활을 관상한다. 이때, 사복음서의 말씀을 따라서 그리스도의 생애를 깊이 관상함으로 그리스도를 깊이 깨닫고 사랑하며, 그리스도를 영의 눈으로 다시 보게 되는 조명에 이르게 된다.
일반적으로 묵상(meditation)이 논리적이라면, 관상(contemplation)은 정감적(情感的)이다. 이냐시오의 관상기도는 “그리스도의 인성 안에는 하나님의 모든 신성이 깃들어 있다”(골 2:10)는 말씀과 연관된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본받고 따르려면, 이천년 전에 사셨던 그리스도의 말씀과 신비에 대한 온전한 깨달음이 필요하다. 이 일을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이 그리스도 생애에 대한 관상기도이다. 관상기도를 통하여 그리스도를 더욱 사랑하면 할수록 영혼이 밝아진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생명의 빛이기 때문이다.

넷째, 하나님과의 연합은 ‘사랑을 얻기 위한 관상’(Contemplation to Attain Love of God)으로 나타난다. 이냐시오는 ‘라 스토르타(La Storta)의 환시’를 통하여 하나님과의 신비한 일치를 경험했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이런 신비체험은 이냐시오만의 독특한 것이기에 일반화하기는 어렵다. 그 대신 이냐시오는 ‘사랑을 얻기 위한 관상’을 제시한다.
이것은 몇 가지의 요점을 묵상함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느끼고 하나되는 경험을 할 수 있다. 첫째는 ‘기억을 통한 묵상’으로, 내가 받은 구원의 은혜나 개인적인 은혜들을 생각하고 묵상하는 것이다. 둘째는 하나님께서 피조물들 안에 내주하심에 대한 묵상이다. 내 안에 내주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묵상으로 성령의 내재성과 친밀성을 깨닫게 하여 하나님과의 연합을 느끼게 한다. 셋째는 모든 선과 은혜가 위로부터 내려옴을 묵상함으로 하나님께서 세상과 인간의 모든 좋은 것의 원천임을 깨닫는 것이다. 이러한 묵상은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을 알고 느끼게 함으로 언제 어디서나 우리가 하나님과 연합하여 있음을 알게 한다.

6.칼빈과 이냐시오를 넘어

16세기 종교개혁의 시기에 칼빈과 이냐시오는 교회개혁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렇게 치열하게 살았던 칼빈은 1564년 55세로 세상을 떠났다. 이냐시오는 1556년 65세로 세상을 떠났다. 칼빈이 친에라스무스적이고 지성주도적인 영성이라면, 이냐시오는 친 토마스 아 켐피스적이고 정감주도적인 영성이다. 이러한 칼빈과 이냐시오 두 사람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교회는 더 든든해지고 강해졌다. 그러나 후대 사람들이 볼 때는 두 사람 사이는 건널 수 없는 큰 강처럼 보이기도 한다. 왜냐하면 500여년의 세월과 교회조직이 있기 때문이다. 과연 그럴까. 필자는 “칼빈과 이냐시오의 영성”이라는 책을 통하여 두 사람만의 독특성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이 만날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하였다. 그 가능성은 바로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영성이요, 지향성이다. 목표와 의도가 동일하다면 접촉접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 접촉접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이다.
일반적으로 개신교회 영성이 역동적이라면 가톨릭교회 영성은 고요하고 깊이가 있다. 두 영성의 흐름은 하나님을 향해 나아가는 흐름임에 틀림없다. 칼빈과 이냐시오는 각자 자기의 방법과 기질과 주어진 여건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일하였다. 그 주요 저서가 칼빈은 기독교 강요이며, 이냐시오는 영신수련이다. 두 책은 두 사람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사용한 최고의 도구였다. 기독교 강요는 강의록 성격이라면, 영신수련은 훈련 매뉴얼 성격이다. 두 책은 단순히 우열을 가릴 수 없는 독특성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두 책이 함께 읽혀지고 사용된다면 보완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마치 양수리에서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서 더 큰 물줄기인 한강을 만들어 내듯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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