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ngJo BBS


작성자
정재상
날짜
10/12/01 2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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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한국 기독교 영성과 사회봉사/ 이강학 교수
 
 

한국기독교 성육신의 영성과 사회봉사



(* 이 원고는 <기독교 사회복지 엑스포 2010> "기독교영성과 사회봉사"라는 포럼에서 발표한 것입니다.)



이강학 박사 (Graduate Theological Union, 기독교영성; 장신대 강사)



국문초록

: 본 논문은 한국 기독교의 영성운동과 사회봉사의 관계를 고찰하였다. 먼저, 기독교 영성이 무엇인지 알아보았다. 기독교 영성학자 샌드라 쉬나이더스 (Sandra Schneiders)의 영성의 정의를 바탕으로 기독교 영성이 무엇인가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다음으로, 위에서 살펴본 정의를 바탕으로 기독교 영성이 사회봉사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제시하였다. 마지막으로, 한국기독교 영성과 사회봉사의 관계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두 가지 운동 즉, 귀일원과 다일공동체를, 그 출발점과 사회봉사의 관계, 영성훈련의 특징이라는 측면에서 고찰하였다. 결론적으로, 두 운동 모두 예수를 사랑하고 예수를 따르려는 것이 모든 활동의 동기였으며, 특히 사회봉사활동은 그 동기에서 나오는 자연스러운 영성훈련이었다.



주제어: 한국 기독교 영성, 사회봉사, 성육신 영성, 귀일원, 이현필, 다일공동체, 최일도



1. 서론



한국 기독교 (개신교) 는 초기부터 사회봉사에 깊이 관련되어 있었다. 그것이 한국사회에 미친 영향이 작지 않아서, 일반인들이 기독교인을 칭찬하는데 좋은 근거를 제공했다. 그러나, 현대 한국 사회가 한국기독교를 보는 시선은 좋지 않다. 한국기독교의 교세에 비하여 사회적인 기여가 낮거나, 심지어는 사회에 악영향을 끼친다는 평가가 많이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기독교가 여전히 다양한 사회봉사활동을 펼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영향력이 평가절하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기독교 영성운동과 사회봉사의 관계를 돌아보는 것은 큰 의미가 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사회봉사활동이 영성운동의 일환이 될 때만이, 대사회적으로 긍정적 영향을 끼칠 수 있는 힘이 생기기 때문이다.



기독교영성은 사회봉사와 어떤 관계가 있을까? 어떤 영성운동은 전혀 사회봉사와 관련이 없는 듯이 보이고, 어떤 영성운동은 사회봉사활동에만 전념하는 것처럼 보인다. 사회봉사를 전혀 안하는 것처럼 보이는 영성운동은 무엇을 지향하는가? 또 사회봉사를 열심히 하는 영성운동이 지향하는 바는 무엇인가? 이 질문들이 본 논문을 이끌어가는 질문들이다. 물론, 이 논문은 사회봉사를 열심히 하는 영성운동에 주로 초점을 맞출 것이다.



이 논문의 순서는 다음과 같다. 먼저, 기독교 영성이 무엇인지 알아본다. 다음으로, 기독교 영성이 사회봉사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살펴본다. 마지막으로, 한국기독교 영성과 사회봉사의 관계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두가지 운동 즉, 귀일원과 다일공동체를, 그 출발점과 사회봉사의 관계, 영성훈련의 특징이라는 측면에서 고찰한다.



2. 기독교 영성이란 무엇인가?



미국의 대표적인 기독교 영성학자 샌드라 쉬나이더스(Sandra Schneiders)에 의하면 영성은 “인식된 궁극적 가치를 목표로 하여 자기 초월을 통한 삶의 통합 프로젝트에 의식적으로 참여함으로써 얻는 경험”(the experience of conscious involvement in the project of life-integration through self-transcendence toward the ultimate value one perceives)이다. 이 영성의 정의를 기독교 영성에 적용하려면, 각각의 문구를 좀 더 자세히 다음과 같이 이해할 수 있다. 위의 정의를 다섯 가지 주제로 구분하여 살펴보자.



1) “인식된 궁극적 가치를 목표로 하여”



기독교 영성은 궁극적 가치로서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첫째, 영성의 목표를 제시해주는 “궁극적 가치”는 기독교 영성에서 하나님이다. 구체적으로 삼위일체 하나님 즉,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다. 둘째, 궁극적 가치를 “목표로 한다”는 것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향하여 믿음을 갖고 나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셋째, 궁극적 가치인 하나님을 삶의 목표로 “인식”하는 것은, 그 자체가 성령의 역사이고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다. 인간이 스스로의 노력으로 하나님을 인식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은혜로 말미암아 삼위일체 하나님을 인식하고 믿음을 갖게 된다. 이 믿음을 통한 삼위일체 하나님 경험을 기독교인의 구체적인 경험을 예로 들어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먼저, 성부 하나님을 경험하는 좋은 예가 자연 속에서 창조주의 능력과 위엄, 아름다우심을 경험하는 것이다.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믿으면, 피조물 안에서 하나님의 솜씨를 보는 경험을 하게 되는 것이다. 높은 산, 깊은 바다, 뜨거운 태양, 끝없는 우주를 보며 크신 하나님을 깨닫고 경외감을 느끼게 된다. 동시에, 피조물의 정교함과 아름다움을 보며 하나님의 지혜로우심과 아름다우심에 감탄하게 된다. 이렇게 하나님이 만드신 자연을 통한 영적경험을 잘 보여주는 영성을 창조의 영성이라고 일컬을 수 있으며, 기독교 영성사에서는 아씨시의 프란치스코와 아일랜드의 켈틱 영성(Celtic spirituality)이 그 대표적인 모델들이다.



다음으로 성자 예수를 믿으면 어떤 경험들을 하게 되는가? 그 분의 성육신을 믿으면, 성자 하나님의 겸손하심을 깨닫게 되고, 몸을 가진 인간의 전존재와 일상적 삶을 하나님이 소중하게 여기신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또, 그 분의 십자가 죽음을 믿으면, 죄사함의 자유를 경험하게 되고, 고난의 의미를 재해석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그 분의 부활을 믿으면 죽음의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를 경험하게 된다. 기독교 영성사에서는 영성운동의 흐름을 불문하고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의 일생 하나하나가 모두 깊은 묵상과 본받음의 대상이 되었다. 예를 들어, 토마스 아 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는 그리스도의 발걸음을 그대로 따라 살려는 갈망을 잘 드러내 보여주고 있고, 로욜라의 이냐시오의 <영신수련>은 예수 그리스도의 일생을 관상하는 가운데, 더 그리스도를 깊이 사랑하고 가까이 따르는 갈망을 불러일으키는데 그 목적을 두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성육신의 영성”이라는 표현은 성자 예수의 성육신적 삶을 따르려고 하는 갈망에서 일어난 영적 운동들을 묘사하고 있다. 당연히, 그 운동의 핵심모토는 겸손, 가난, 고난, 그리고 봉사 등이 될 것이다. 겸손, 가난, 고난, 그리고 봉사는 기독교 영성사를 꿰뚫는 다양한 금욕 운동들의 동기를 부여해주었다.



마지막으로 성령을 믿으면 어떤 경험을 하게 되는가? 조명의 영인 성령은 우리의 마음 눈을 밝혀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갖게 하고, 더불어 나를 아는 지식을 갖게 한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과 나와 세상에 대한 깨달음을 얻게 된다. 그 결과 더욱 지혜롭게 되고, 하나님의 뜻에 대한 분별력이 생긴다. 또한 생명의 영인 성령은 우리 안에 생명을 존중하고 사모하는 마음을 불러일으킨다. 아울러, 하나님의 일을 위해 생명의 능력을 소유하게 하신다. 이외에도 성령은 우리 마음을 위로하고, 인도하고, 변호해주며, 감동시켜서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게 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마음을 불러일으켜준다. 무엇보다도 임재의 영인 성령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심을 언제어디서나 경험할 수 있게 해준다. 마지막으로, 기독교 영성사에 있어서 성령은 영분별(또는 영적식별)과 관련해서 특히 관심을 끌었다. 과거에 영분별은 주로 사람의 내적 움직임들을 성찰하고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데 도움이 되는 생각들을 선택하고 덕을 함양하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 그러나, 현대에 오순절 운동이 강하게 일어나면서 그리스도를 닮은 성품보다는 외적 능력들에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되는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이상에서 간략하게 살펴본 바와 같이, 기독교인의 궁극적 가치인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하나이지만, 영적 경험의 초점을 삼위일체 하나님의 어떤 특징에 두느냐, 다르게 표현하자면, 하나님의 부르심이 어느 방향으로 향해 있느냐에 따라 다양한 영성운동으로 전개될 수 있다는 것을 감지할 수 있다.



2) “자기 초월을 통한”



기독교 영성은 자기를 초월하는 경험과 관련되어 있다. 기독교인에게 있어서 자기를 초월한다는 것은, 자기의 육신적, 정신적 한계를 넘어서서 예수의 삶과 인격에 가까이 다가서는 것을 의미한다. 기독교인의 자기 초월은 예수를 지향하는데 인간으로서 경험하는 한계가 그것을 가로막는다. 인간의 한계는 기본적으로 몸을 소유하는데 기인한다. 몸을 갖고 있는 한, 인간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한 순간에 한 장소에 머물 수밖에 없다. 동시에 여러 군데 머물 수는 없다. 또, 일정 시간을 살면 모두 죽는다. 인간이 경험하는 한계 상황은 인생에 고통을 야기한다. 질병과 사고로부터 오는 고통이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몸이 있는 한 누구나 맞닥뜨릴 수밖에 없는 것들이다. 그러나, 이런 한계들은 한편으로 고통을 가져오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 한계를 초월하려고 하는 갈망을 품게 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기독교 영성사에 있어서 영적 성장의 삼단계로 알려진 정화(purification), 조명(illumination), 그리고 일치(unification)의 과정은 모두 기독교인의 자기 초월의 경험을 잘 묘사해주고 있다. 정화의 경험 즉, “마음의 청결”을 통해, 기독교인은 내적이고 외적인 죄악된 습관들을 버린다. 조명의 경험을 통해 하나님을 아는 지식(God-knowledge)과 나를 아는 지식(self-knowledge)이 형성된다. 일치의 경험을 통해 하나님과 깊은 사랑의 교제를 나눌 수 있게 된다. 12세기의 영성가 클레르보의 버나드는 자기 초월로서의 영적 성장을 “사랑의 네 단계”라는 비유로 잘 설명해주고 있다. 버나드에 의하면, 사랑의 첫 번째 단계는 나를 위해 나를 사랑하는 단계이다. 두 번째 단계는 나를 위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단계이다. 세 번째 단계는 하나님을 위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단계이다. 마지막으로 네 번째 단계는 하나님을 위해 나를 사랑하는 단계이다 (또는 하나님을 위해서만 나를 사랑하는 단계). 버나드의 설명은 사랑이라는 관점에서 영적 성장이 어떤 자기 초월을 이루어가는 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결론적으로, 자기초월은 영적 성장이라는 변화를 의미하며, 기독교 영성은 기독교인으로 하여금 이기적인 사랑을 초월해서 이타적인 하나님 사랑으로 나아가는 것을 목표로 하며, 여기에서 하나님 사랑은 이웃 사랑을 내포하고 있다.



3) “삶의 통합 프로젝트에”



기독교 영성은 삶을 통합하는 프로젝트 안에서의 경험과 관련되어 있다. 기독교인에게 있어서 삶의 통합 역시 예수 그리스도를 지향한다. 기독교인은 삶의 통합의 궁극적 모델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찾기 때문이다. 기독교 영성에서 삶을 통합하는 프로젝트가 의미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닮아가기 위한 영성훈련(spiritual disciplines)이다. 기독교 영성은 삶의 통합을 지향하고, 기독교 영성운동들은 삶의 통합을 위한 다양한 영성훈련들을 제공한다. 그렇다면, 영성훈련들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며, 영성훈련들은 어떻게 삶의 통합에 기여하는가?



영성훈련은 과거에는 교회의 치리나 금욕적 행위들을 가리켰으나, 최근에는 좀 더 일반적인 헌신 또는 제자도를 위한 훈련들을 가리킨다. 이런 관점에서 현대의 대표적인 개신교 영성가인 리처드 포스터는 영성훈련을 다음과 같이 내적 훈련과 외적 훈련, 공동체 훈련으로 분류 한다: 내적훈련들은 묵상, 기도, 금식과 연구 등; 외적훈련들은 단순, 고독, 복종, 그리고 봉사 등; 공동체 훈련들은 고백, 예배, 안내, 그리고 경축 등. 이 분류를 이해할 때 중요한 것은 내적훈련, 외적훈련, 그리고 공동체훈련이 통합적으로 균형 잡히게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홀로 사막에서 평생을 수도하던 은수자들이라고 할지라도, 매일 노동을 했고, 비록 자주는 아닐지라도 도움을 청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꺼이 봉사하는 삶을 살았다. 아울러, 늘 봉사 활동하던 프란치스코회 수도자들이라고 할지라도, 매일 기도하는 삶을 빠트리지 않았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영성훈련은 삶이 하나님 안에서 새로운 질서를 잡도록 도와줌으로써 삶의 통합을 이룰 수 있게 한다. 모든 기독교 영성훈련은 삼위일체 하나님께 기독교인의 주의를 집중시킨다. 기독교인은 이를 통해 세상을 향해 흩어지기 쉬운 마음을 하나님을 향해 모을 수 있고, 자신의 삶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돌아볼 수 있게 된다. 삶의 모든 경험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의미를 부여받고 통합적으로 인식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로욜라의 이냐시오가 <영신수련>의 첫 번째 일러두기에서 말하는 바는 도움이 된다.



영신수련이란 양심 성찰과 묵상 기도, 관상 기도와 염경기도 및 침묵 중에 기도하는 방법을 포함한 앞으로 다루게 될 모든 정신 활동의 방식들을 말한다. 산보와 걷기, 달리기가 몸의 운동인 것처럼 온갖 무질서한 애착을 없애도록 우리 정신을 준비하고 내적 자세를 갖추며 그런 다음에 영혼의 구원을 위하여 자신의 인생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찾고 발견하려는 모든 방법을 영신수련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냐시오는 삶의 통합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뜻을 잘 분별할 수 있어야하는데, 이를 위해 무질서한 애착을 없애는 훈련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더 나아가 “원리와 기초”에서는 무질서한 애착이 없어지고 모든 피조물들에 대해 초연해진 상태가 어떤 것인지를 보여준다: “그리하여 우리 편에서는 질병보다 건강을, 가난보다 부를, 불명예보다 명예를, 단명보다 장수를 더 원하지 않을 수 있게 되고 그리고 다른 모든 일에서도 이와 마찬가지로, 오직 창조된 목적으로 우리를 더욱 이끄는 것을 원하고 선택하도록 해야 한다.” 영성학자 마이클 다우니는 현대 사회에서 영성의 부활이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것은 그것이 비인간화와 분열에 대한 해결책이 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영성훈련은 현대 사회에서 그것을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분열을 통합으로 이끄는 구체적인 해결방법이 될 수 있다.



4) “의식적으로 참여함으로써”



기독교 영성은 의식적 참여와 관련되어 있다. 의식적 참여란 자발적이고 의지적이고 인격적인 참여를 가리킨다. 이를 위해 주의를 집중하는 마음가짐 그리고 깨어있는 마음가짐이 필수적이다. 기독교 영성적 경험은 의식적 참여가 없는데 저절로 획득하게 되는 것이 아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전서 5:16-18절에서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라고 지시한다. 여기에서 “항상”, “쉬지 말고”, “범사에”라는 단어들이 의지적 노력을 내포하고 있음을 주시할 필요가 있다.

의식적 참여의 신학적 기초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셨다는 인간론에 기초를 두고 있다. 영성훈련에 참여하는 것은 기독교인이 자유롭게 의지적으로 선택한 결과여야 한다. 원칙적으로, 억지로 또는 아무 생각 없이 참여하게 된 영성훈련은 영적 성장의 경험으로 인도하지 못한다.



5) “얻는 경험”



기독교 영성의 주요소는 경험이다. 이 경험은 기독교 영성에서 구체적으로 삼위일체 하나님을 만나는 경험이다. 과거에는 이 경험의 초자연적 성격에 지나치게 초점을 맞추는 바람에 기독교영성을 신비주의라고 오해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삼위일체 하나님을 경험한다는 것은 꼭 신비주의적 경험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근본적으로 기독교인이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하는 모든 경험이 사실은 신비적인 경험이다. 중생과 칭의로부터 시작해서, 일상생활 속에서 성령의 조명으로 하나님을 깨닫고 만나고 알게 되는 모든 경험이 비기독교인의 관점에서 볼 때는 신비적 경험이다.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자기의 이기심과 욕심을 넘어서서 봉사하는 자기 초월적 경험 역시 신비적 경험이다. 그러므로, 기독교 영성적 경험을 초자연적인 경험과만 등치시키는 오류를 범해서는 안 된다.



아울러, 이 경험이 일회적이고 고정적인 경험이 아니라 지속적이고 생산적인 경험이라는 것을 주지할 필요가 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을 만나 계시를 받은 경험은 일회적으로 끝난 사건이 아니라, 출애굽을 가능케 하고 모세오경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백성 공동체가 되는 데까지 나아갔다. 예수의 제자들이 예수를 만나 십자가와 부활을 목도하게 된 경험은 제자공동체를 낳았고, 오늘에까지 교회를 전 세계에 확산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마찬가지로 크고 작은 기독교 영성운동들은 그 설립자들의 하나님 경험에서 비롯되었으며, 그 시대와 문화 속에서 활동하신 성령의 역사를 보여주는 모델로서 기능했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이 일상 속에서 하는 하나님 경험은 개인 안에만 머물러 있는 경험이 아니라, 그가 속한 교회 공동체를 통해 더 큰 반응을 불러일으키고 하나의 운동으로 연결될 수 있는 씨앗을 품고 있는 경험들인 것이다.



이상의 다섯 가지 문구를 통해 나타난 기독교 영성의 정의를 다음과 같이 정리해볼 수 있다. 기독교 영성이란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영적 성장을 위한 영성훈련에 의식적으로 참여할 때, 은혜로 얻게 되는 경험과 그 경험에 대한 반응들”이다.



3. 기독교 영성과 사회봉사



사회봉사란 무엇인가? 필자는 사회사업학자인 데럴 와킨스가 사회봉사에 대해 내린 정의를 사용하려고 한다. 와킨스에 의하면 사회봉사 (social ministry) 란 “영적, 신체적, 정서적, 정신적, 관계적 문제들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돕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기독교 영성은 사회봉사와 어떤 관계가 있는가? 기독교 영성과 사회봉사가 어떤 관련이 있는지 위에서 살펴본 다섯 가지 범주에 의지하여 다시 한 번 살펴보자.



1) 기독교인에게 있어서 사회봉사는 하나님을 경험하는 삶의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을 경험한 사람은 자연스럽게 사회봉사를 하게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경험한 사람은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을 맛보게 되고, 그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 자비와 사랑을 실천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구약성경에서 창조주이신 성부 하나님은 “고아와 과부”의 보호자로 계시되고 있다 (시편 68:5). “고아와 과부”는 구약 성경에서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을 대표하는 표현이다. 그러므로, 야고보서 2:27이 성부 하나님과 고아와 과부를 돌보는 봉사를 관련시키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



또한, 성자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읽은 이사야서의 본문 역시 사회봉사를 담고 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눅 4:18-19; 사 61:1-2). 이 구절은 예수의 공생애 사역이 가난한 자, 포로된 자, 눈먼 자, 눌린 자 들을 위한 섬김이 될 것이라는 것을 명시할 뿐만 아니라, 그 사역들이 성령이 임함으로써 가능해진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이상에서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주 관심의 대상이 세상에서 소외된 자들이며, 삼위일체 하나님의 활동이 그들에서 우선적으로 나타날 것임을 예상할 수 있다. 그러므로, 삼위일체 하나님을 경험한 기독교인들의 삶이 사회봉사로 나타나는 것은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위의 사실에 기초하여 역으로 살펴보면, 사회봉사는 하나님을 정말 만났는가 그리고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며 살고 있는가를 분별할 수 있는 시금석이 된다. 개신교의 대표적인 영성가인 조나단 에드워즈는 <신앙과 정서>(Religious Affections)라는 책에서 성령의 역사로 경험한 은혜로운 정서의 열두 가지 표지 중 마지막 표지로서 “실천”(practice)을 제시하고 있는데, 이 실천은 사회봉사를 포함하는 것이다.



기독교의 신앙고백자가 그 행실을 통해 환난 중에 있는 다른 사람들을 향하여 불쌍히 여기는 부드러운 마음을 가짐으로써 그 진실성을 드러내고, 참화를 만난 사람들의 짐을 대신 지려고 하며 그들을 위해 자기의 물질을 쓰고, 다른 사람의 영혼과 몸의 유익을 위해 자기의 세상 이익을 많이 손해 보려고 한다면, 그저 말로만 자기가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고 하는 사람보다도 사람들을 사랑한다고 믿을 만한 더욱 확실한 증거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의 영성운동을 살펴볼 때, 가장 먼저 보아야하는 것은 그 영성운동의 설립자가 어떤 하나님을 경험했는가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경험한 하나님이 그 자신을 비롯해서 그를 통해 형성된 공동체의 실천의 성격, 다시 말해서, 사회봉사의 성격을 특징 짓기 때문이다.



2) 기독교인에게 있어서 사회봉사는 자기초월 즉, 영적 성장의 과정이 될 수 있다.



기독교 영성에서 사회봉사는 그 자체가 영성생활의 목표는 아니다. 사회봉사를 완벽하게 해내는 것이 영성생활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지만, 사회봉사는 성도가 하나님을 향해가는 여정의 중요한 한 과정으로서 제시된다. 그러므로, 기독교 영성사에 등장한 영성운동들은 각기 다른 비율로 사회봉사에 참여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어떤 영성운동은 사회봉사에 전적으로 투신하지만, 다른 영성운동은 얼른 보면 사회봉사에는 전혀 시간을 할애하지 않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인도의 성인 마더 데레사를 따르는 수녀회의 수녀들은 하루 종일 봉사에 혼신의 힘을 쏟는다. 그러나, <위대한 침묵>이라는 다큐멘터리에 소개된 알프스 산에 있는 한 카르투지오 수도회 수사들은 일평생 세상에 나오지 않는다. 어떻게 보면, 전자는 사회봉사의 대표적인 영성운동이고 후자는 사회봉사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영성운동으로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기독교 영성의 관점에서 볼 때, 전자의 수녀들이 사회봉사에 참여하는 궁극적인 이유는 하나님을 향해 영적으로 성장하기 원하는 갈망 때문임을 기억해야 한다. 반대로, 후자의 수사들의 침묵과 고독이라는 활동 역시 미시적인 차원에서 “봉사”에 깊이 간여하고 있고, 거시적인 차원에서 세상을 섬기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미시적인 차원에서 카르투지오회 수사들은 매일 맡겨진 임무에 순종해서 노동을 한다. 그 노동은 공동체를 섬기는 봉사이다. 거시적인 차원에서 그들은 침묵과 고독을 지키고 경험함으로써 세상에 영성의 맑은 샘물을 제공하는 영적 봉사를 하고 있는 것이다. 위의 사회봉사에 대한 정의에서, 사회봉사가 “영적” 문제를 도와주는 것을 포함한다는 것에 착안한다면, 카르투지오회 수사들도 넓은 의미로 사회봉사에 참여하고 있음을 인식할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의 영성운동을 살펴볼 때, 기존의 사회봉사라는 말이 담고 있는 범주에 머물지 말고, 그 영성운동이 자기초월의 여정으로서 어떤 차원의 사회봉사를 실천하고 있는지를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3) 기독교인에게 있어서 사회봉사는 삶을 통합시키는 프로젝트 즉,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도록 돕는 영성훈련이 될 수 있다.



하나의 영성운동을 살펴볼 때,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그 영성운동의 구성원들이 참여하는 사회봉사라는 영성훈련이 설립자를 비롯해서 구성원들의 삶을 통합시키는데, 삶의 모든 면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일에 어떻게 기여하고 있는가 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4) 기독교인에게 있어서 사회봉사는 의식적 참여에 해당한다.



의식적 참여의 관점에서 던질 수 있는 질문은 다음과 같다: 영성운동에 참여하는 구성원들이 사회봉사에 의식적으로 자발적인 의지를 갖고 참여하고 있는가? 구성원들이 사회봉사에 있어서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도록 항상 일깨워주고 있는가?



5) 기독교인에게 있어서 사회봉사는 하나님 경험의 현장을 제공한다.



앞서 언급한대로 하나님을 만난 경험이 사회봉사로 자연스럽게 연결되지만, 역으로 사회봉사의 현장은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성운동 구성원들이 사회봉사를 하면서 하나님을 어떻게 경험하고 있는지를 확인해볼 필요가 있다.



요약하면, 사회봉사를 우선적으로 실천하는 영성운동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던져볼 수 있다: 그 영성운동의 설립자와 구성원들이 만난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인가? 그들은 영적성장을 어떻게 이해하는가? 그들은 어떤 영성훈련에 집중하는가? 그들은 의식적이고 자발적인 참여를 위해 어떤 노력들을 하는가? 마지막으로 그들은 사회봉사를 통해 어떤 하나님 경험을 하게 되는가?



4. 한국기독교의 영성과 사회봉사



한국 교회에도 수많은 영성 운동들이 나타났었다. 그리고 많은 영성 운동들은 사회봉사를 우선순위에 놓고 실천하였다. 이 논문에서는 그 중에서도 개신교의 대표적인 두 가지 운동, 즉 귀일원(동광원) 운동과 다일공동체 운동에 초점을 맞춘다. 특히, 이 영성운동들이 어떻게 사회봉사에 그토록 혼신의 힘을 기울이게 되었는지 그 영성적 배경을 살펴보려고 한다.



1) 귀일원 운동과 사회 봉사



“귀일원”은 1949년 이현필 선생(1913-1964)이 여순사건 이후 생긴 많은 고아들을 돌보기 위해 전남 화순에서 “동광원”이라는 이름으로 창립 되었고 1951년 귀일원으로 명명되었다. 한국전쟁 직후에는 고아 600여명과 광주천 다리 밑의 노숙인들을 돌보기도 하였다. 1965년 사회복지법인이 되어 현재는 “귀일정신요양원”에서 성인 여자 정신 장애인들을, “귀일민들레집”에서 성인 지적 장애인들을, 그리고 “귀일향기일굼터”에서 장애인 재활을 돕는 활동들을 하고 있다. 귀일원은 동광원이라는 이름으로 혼용되기도 하였으나, 동광원은 현재 “기독교 동광원 수도회”라는 이름의 수도단체를 가리킨다. 비록 현재 귀일원과 동광원은 완전히 구별된 단체로서 존재하지만, 이현필 선생에서 시작된 영성 운동의 뿌리는 동일하고, 선생의 생존 시에는 동광원과 귀일원을 구분하는 것이 큰 의미를 갖지 않는다고 판단 된다. 그래서, 필자는 귀일원 운동이라는 표현을, 동광원과 큰 구분 없이 이현필 선생의 직접적인 지도력 하에 있던 시기를 염두에 두고 사용하려고 한다.



아울러, 이 논문에서는 귀일원 운동의 사회봉사 활동을 자세히 살펴보기 보다는 귀일원의 영성 운동이 사회봉사 활동에 중심을 두게 된 영성적 배경에 초점을 두고 살펴보려고 한다. 그러면, 먼저 귀일원 운동의 출발과 목표인 하나님 사랑에 고찰한 후, 귀일원 운동의 사회봉사와 영성훈련의 관계를 살펴보자.



(1) 귀일원 운동의 출발과 목표: 하나님 사랑



귀일원 운동은 그 출발이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운동이다. 귀일원은 이현필 선생이 벙어리 수도를 하면서 지은 이름으로 “하나님 한분께로 돌아가자”는 뜻을 담고 있다. 귀일원은 “하나님께 돌아가 하나 되어 사는 공동체”라고 자기 정체성을 규정하고 있다.



귀일원의 설립자인 이현필 선생의 삶은 철저하게 하나님을 구하는 삶이었다: “평생을 통해 구할 것은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은 영생을 얻는 일입니다.” 이현필 선생의 설교문,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귀일원 운동의 이런 영성적 배경을 잘 밝혀주고 있다. 이 설교문에서 귀일원 영성 운동의 궁극적 목표가 지닌 특징들을 몇가지로 정리해볼 수 있다. 첫째, 영성생활은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그가 우리를 사랑하심을 믿고 아는 데서 출발한다. 둘째,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의 사랑을 아시고 믿으실 뿐만 아니라 아버지를 깊이 사랑하심으로써 우리의 본이 되신다. 셋째, 예수님을 통해 성부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우리를 참으로 사랑하심을 믿을 때에, 우리는 영적성장을 경험할 수 있다: “우리도 예수님을 믿고 그리스도의 교훈을 참말로 알아 하나님 아버지의 살아 계심과 우리를 참으로 사랑하심을 믿을 때에, 우리 마음과 생활이 깨끗해지는 변화가 올 것입니다.” 넷째, 성부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그의 사랑을 모르면서 하는 영성훈련은 헛된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의 현존하심과 그의 깊으신 사랑은 모르면서 생활만 고쳐 보려 애쓰는 것은 허사요, 헛꿈이요, 헛세월만 보내는 결과가 되고 말 것입니다.” 다섯째, 성부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먼저이고, 권능을 받고, 이적과 기적을 경험하는 것은 나중이다.



하나님을 향한 이현필 선생의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경험한데서 나오는 것이었다. 그가 하나님의 사랑을 어떻게 경험했는지 자세한 기록은 내려오지 않는다. 이와 관련된 그의 신앙경력을 잠시 살펴보면, 13세에 처음 교회에 출석하였고, 22세에 이세종 선생을 만나 가르침을 받기 시작했으며, 24세에는 강순명 목사의 독신전도단에서 활동하다가, 25-28세에 (1937 - 1940년) 전남 화순 화학산에서 이세종 선생의 지도를 받으며 기도생활을 하였고, 29-32세에는 (1941 - 1944년) 전북 남원의 서리내와 갈보리 등지에서 기도생활을 하였다고 한다. 어쩌면 화학산 기도 시기와 서리내 기도 시기가 이현필 선생의 하나님 경험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시기들일 가능성이 많다. 엄두섭 목사는 화학산 기도시기 후에 선생의 모습이 “완전히 청빈한 탁발수도자가 되었고, 성 프란치스꼬와 같은 모습을 닮아갔으며, 자비롭고 겸손한 성자의 풍모를 보였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서리내 기도 시기를 “이현필의 아라비아 사막 속의 바울의 체험과 같은 시기였다”고 평가하고 있다. 서리내 기도 시기에 내려오는 일화는 이현필 선생의 기도 경험이 얼마나 대단한 것이었는지를 잘 보여 준다.



... 이현필은 우거진 솔밭, 갈대밭 속에 한번 엎드리면 꿈쩍도 않고 영 일어날 줄 몰랐다. 산에 사는 까마귀는 송장인 줄 알고 곁에 와서 까악까악 울다가, 그래도 움직이지 않으니 부리로 쿡쿡 찍었다고 한다.

그 모양으로 밤을 지내고 새벽에 잔등에는 서리가 하얗게 덮이고, 수염에는 고드름이 달린 채 가슴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의 사랑이 밀려와 감격하여 통곡하며 “갈보리 산” 노래를 불렀다.



갈보리 산에서 십자가를 지시고

예수는 귀중하신 보배피를 흘리사

구원받을 참 길을 열어 놓으셨느니라

갈보리 십자가는 저를 위함이요

아 십자가 아 십자가

갈보리 십자가는 저를 위함이요



눈물을 흘리며 이 노래를 부르며, 무명바지 저고리에 맨발로 산을 내려오는 이현필을 보고, 젊은 남녀는 감격하여 자기들도 함께 부르며 울었다. 이현필의 모습은 한국의 청빈 탁발 수도자였고, 자비와 겸손의 성인의 모습이었다.



밤새 추위를 잊고 움직임도 없이 무아의 경지에 깊이 빠져든 기도는 하나님의 사랑에 완전히 사로잡히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구체적으로 감지되었다. 이현필 선생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깊이 경험했다는 것은 그가 남긴 다음의 설교문에서 느낄 수 있다:



그리스도의 사랑에 접촉해야 합니다. 그리스도 사랑에 직접 접촉하지 않는 한 아무리 사랑 설명을 들어도 시원치가 않습니다. 물 속에 잠기듯 사랑에 잠겨야 합니다. 그것이 믿는 일입니다. 금식하고 절제하는 것도 사랑에 감격되어 해야지요. 고생도 사랑에 못 이겨서이고, 고기를 안 먹는 것도 그 은혜가 더 좋아서 안 먹고요, 사치를 안하는 것도 그렇고요. 정욕을 떠나는 것도 그렇습니다. 그 은혜에 감격되어지는 일이고 그 사랑에 끌리는 것이 아니면 모두가 억지짓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에 직접 접촉”한 이현필 선생은 그 마음에 예수 그리스도를 닮고자 하는 간절한 열망이 가득했다. 그 갈망은 그의 일기 곳곳에 표현되어 있다. “주님 닮게 해 주소서. 주님, 주님 닮게 해 주소서. 부족한 자식을 써서 주님같이 거룩히 만들어 주소서.” “주님 기뻐하시는 일만 하게 해 주시고, 기뻐하시지 않는 일은 삼가 피함을 주소서.” “주님께서 긍휼히 여기시는 일에만 저도 긍휼한 마음이 일게 해 주소서.” “제 안에 주님께서 계셔 주옵소서. 무슨 물건이 필요한 것보다 주님께서 제 안에 계셔 주시는 일이옵나이다. 주님 제게로 오소서. 가르쳐 주소서. 축복해 주소서. 주님 뜻 알려주소서. 주님 뜻대로만 준행케 해 주소서.” “그리스도의 형상이 제 안에 이뤄지는 것만이 제게 소원입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인류를 부모요, 형제요, 자매처럼 여기셨습니다. 저와 만나는 이는 누구나를 부모, 형제, 자매로 여겨져야 [주님] 뵈올 자격이 있다는 것이 이제야 알아집니다.” “주님, 빈 마음 주시고, 주님을 간절히 사랑케 해 주소서. 빈 마음 안에 주님 오옵소서.”



이현필 선생의 하나님 사랑의 영성은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닮고자 하는데서 또한 그 특징을 찾을 수 있다. 그는 “참 신앙, 참 인격”이라는 설교문에서 참된 신앙은 참된 인격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고 강조한다.



믿을수록 인격이 나아지지 않으면 사탄과 같이 되어집니다. 그러므로 저급한 신앙은 도리어 악한 짐승을 만듭니다. 참 신앙의 필요가 얼마나 절감되는지 알 수 없습니다. 반드시 참된 인격은 참 신앙에 뿌리를 둡니다. 거짓된 인격과 거짓된 신앙은 서로 떠날 수 없습니다. ... 참된 인격이란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예수님같이 되자는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너그럽고, 예수님처럼 누구나 사랑하며, 예수님같이 하나님 아버지만 신뢰하고 변치 않는 사람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는 또 구원을 “인격 완성”으로 설명한다: “구원이란 결국 인격 완성에 있으므로 교회당이나 세례, 성찬, 의식이나 율법적인 제도로는 이뤄지지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참 믿음, 참 인격, 참 수양”이라는 제목의 설교에서도 인격 수양이 세상의 소금의 빛이 되는 데 있어서 필수적임을 지적한다: “둘째로 인격을 아시기 원하는 바입니다. 믿는다고 해서 자기 존엄한 품위를 짓밟아버리는 사람이 있는데, 그는 소금과 빛이 못됩니다. 그런 이는 아무리 애써 일해도 세상 일이 되어 버립니다.”



(2) 귀일원 운동의 사회봉사와 영성훈련



이현필 선생의 사회봉사 정신과 활동은 하나님을 향한 그의 사랑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뜨거운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이 이현필 선생과 귀일원 운동의 모든 봉사활동들을 설명해주는 열쇠라고 할 수 있다. 이현필 선생의 삶의 모델은 성자 예수였다. 특히, 위에서 요약한 설교문에 잘 나타나듯이, 그는 사회봉사를 포함해서 예수의 하신 일들이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성부 하나님을 간절히 사랑하는 것의 결과로서 나타났다는 사실을 무척 강조하고 있다.



주님을 사랑하는 이가 가난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주님은 가난하셨기 때문입니다. 가난 이외의 것으로 주님을 사랑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이는 동정을 사랑 않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주님은 동정을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동정 이외의 것으로는 주님을 만족토록 섬길 수가 없는 까닭에 자진해서 정절을 사랑할 것입니다. 주님을 위해서라면 어떠한 고독도 슬픔도 모욕도 괴로운 처지도 오히려 가볍게 여길 것입니다. ... 그리스도의 사랑을 아는 이가 아니고 사람을 사랑[하는 것]을 알 리도 없고, 그리스도의 사랑 아니고는 누구를 사랑한다는 말도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만이 사랑이시며, 그리스도의 사랑만이 참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위의 인용문은 영성훈련과 관련해서 두 가지를 잘 요약해준다. 첫째, 귀일원 운동에서 영성훈련이란 주님에 대한 사랑과 섬김의 표현이다. 귀일원 운동의 출발과 목표가 하나님 사랑이므로, 영성훈련이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섬김의 표현이 될 것이라는 점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이 주제는 앞에서 충분히 다루었다. 둘째, 귀일원 영성 운동에서 중요한 두 가지 영성훈련은 가난과 동정이다. 귀일원 운동의 영성훈련을 간략하게 설명하면 가난을 추구하는 영성훈련과 동정을 추구하는 영성훈련으로 나눌 수 있다. 여기에서 가난을 추구하는 영성훈련은 사회봉사로 연결되었고, 동정을 추구하는 영성훈련은 수도생활로 연결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귀일원 영성 운동에 있어서 가난을 추구하는 영성훈련과 동정을 추구하는 영성훈련은 둘 다 인간의 한계를 초월하는 길을 제시하는 영성훈련들이었다. 먼저, 가난을 추구하는 영성훈련은 탁발과 돌봄으로 구체화되었는데, 둘 다 극단적이라고 할 만큼 훈련받는 사람을 한계상황에 맞닥뜨리게 했다. 이현필 선생을 따르던 분들 가운데는 지성인들도 있고 부유한 집안의 여성들도 있었는데, 그들도 모두 탁발을 경험해야 했다. 탁발 훈련은 그들의 자존심을 완전히 내던지게 하고, 겸손을 배우는 중요한 훈련이 되었다. 이현필 선생은 스스로를 “헌신짝”이라고 불렀으며, 할 수만 있으면 맨발로 다녔고, 식사할 때 밥상 없이 바닥에서 먹었다. 가난과 고통을 복으로 여겼다. 제자들에게 넝마주이 훈련을 시키기도 했다. 한편, 노숙인이나 결핵환자들에 대한 돌봄 훈련도 적당히 하지 않았다. 노숙인들을 위해 쌀 한 숟가락씩을 나누는 “일작운동”을 펼치기도 하고, 하룻밤을 재워 보내는 운동을 하기도 했다. 이현필 선생은 제자와 함께 사용해야하는 하나밖에 없는 이불을 노숙인에게 줘버리기도 했다. 제중원에서 일하던 동광원 수녀들의 희생적 돌봄은 다른 간호원들과는 비교할 수 없도록 헌신적이었다. 각혈하는 폐환자들의 피를 닦아줄 뿐만아니라, 화장실 청소는 물론이고, 폐결핵 환자 요양소에 있는 더 가난한 환자들을 위해 꾸정물 통에 버린 남은 밥을 건져내는 일까지 했다.



다음으로, 동정을 추구하는 영성훈련 역시 극단적으로 강조되었다. 이현필 선생의 동정훈련에 있어서 특이한 것은 결혼 자체를 죄악시한 것이다. 이현필 선생 스스로 결혼한 지 2년 만에 동정생활을 하기로 결단하였고, 5, 6년이 지난 후에는 해혼 하기에 이르렀다. 선생을 따르는 제자들 가운데 처녀 총각들은 결혼을 하지 말도록 설득했다. 이미 결혼한 사람들도 스승을 따라 가정을 떠나 동정생활을 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엄두섭 목사는 이현필 선생의 순결주의의 해석에 대한 논란이 있음을 인지하지만, 수도생활에 있어서 순결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강조하는 차원에서 이를 이해하려고 한다. 결혼생활을 영성훈련에 있어서 순결(virginity)을 지키고 독신수도하는 것보다 더 낮은 단계로 보는 관점들은 기독교 영성사에 빈번이 언급되지만, 결혼을 죄악시까지 하는 것은 드문 관점임에 틀림없다. 결론적으로, 이현필 선생이 중심이 된 영성 운동의 영성훈련들이 가난을 추구하는 차원이든지, 동정을 추구하는 차원이든지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의 한계를 완전히 초월하도록 초청한다는 것은 너무도 분명한 사실이다. 따라서, 귀일원 운동에서 나타나는 사회봉사 활동들이 이런 자기 초월적 영성훈련의 일환이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귀일원 운동에서는 사회봉사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그 활동들을 단순한 봉사활동이 아니라 하나님께로 다가가는 영적 성장에 도움이 되는 영성훈련으로 여기도록 촉구받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현필 선생의 영성훈련과 관련해서 꼭 언급해야할 것은 영성훈련으로서의 인격수양이다. 앞서 인용한 설교문 “참 신앙, 참 인격”은 참된 인격을 위한 영성훈련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참된 인격을 생각지 못하는 생활은 진실로 헛되고 아깝고 가련한 것입니다. 무엇보다 귀하고 보배스러운 자기 인격을 날마다 생각하고 배양할 것입니다. 그것이 수양입니다. 수양이란 공부가 아닙니다. 직업이 아닙니다. 인격에 실력을 얻는 일입니다. 모든 일에 굳센 의지와 밝은 이성을 가지고 사리를 판단하고 처리하며 순수한 이성, 누구에게나 자비를 베풀며 가장 공정하게 대하여 편벽이나 이그러짐이 없도록 하는 수련입니다. 이 연습을 날마다, 시간마다, 대하는 사람마다, 일마다, 모든 물건에까지 나타내서 쓰는 연습이니 함부로 지내심이 없으시기 원합니다. 양철통 하나 두는 것도, 수양하는 이가 두는 것은 달라야 합니다. 흙 위에 그냥 두거나 밤이슬 맞는 곳에 두지 않습니다. 외못 한 개, 흙 한 덩어리도 제자리에 놓아 두는 이가 됩니다.



위 인용문은 이현필 선생이 강조하는 영성훈련의 특징을 몇 가지 보여준다. 첫째, 영성훈련으로서의 인격 수양은 한국 유교 전통의 영성훈련을 기독교적으로 잘 해석하고 적용한 것이다. 이를 위해 수양의 개념을 공부 또는 직업이라는 협소한 정의에서 해방시켰다. 수양은 인격에 순수한 이성을 지니게 하며 자비와 공평한 마음으로 다른 사람을 대하게 하는 영성훈련이다. 이는 한국 유교의 선비들이 추구하였지만 대다수 실패했던 것을 완성하는 표현이라고도 할 수 있다. 둘째, 인격 수양은 가난을 추구하는 영성훈련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탁발에 사용하던 “양철통”을 어디에 두는가, 즉 흙 위에 그냥 두는가, 밤이슬 맞는 곳에 두는가 하는 것을 인격 수양과 연결시키는 것이 그 점을 잘 말해준다.



2) 다일공동체 운동과 사회 봉사



올해로 창립 22주년을 맞은 다일공동체는 1988년 말에 최일도 목사가 서울 청량리에서 노숙인들에게 라면을 끓여주면서 시작되었다. 1996년 밥퍼 나눔운동본부가 출범했고, 1998년 사회복지법인 다일복지재단이 창립되었으며, 1999년 가평에서 다일 영성생활수련원이 시작되었다. 2002년에는 무료병원인 다일천사병원을 준공했고 2004년 자연치유센터를 가평에 열었다. 1999년 중국다일공동체에서 어린이집을 시작한 이후로, 2002년 베트남, 미국, 2004년 캄보디아, 2005년 필리핀, 2007년 네팔 등에 차례로 공동체가 세워지고 밥퍼 사역을 포함하여 사회봉사 활동이 해외로 확산되었다. 장신대 임성빈 교수는 “다일공동체의 문화사적 의미”라는 글에서 “다일공동체는 한국 개신교가 자랑할 수 있는 도시빈민을 위한 사역 기구가 되었다”라고 다일공동체 20주년의 의미를 정리하고 있다. 다일공동체가 사회봉사라는 분야에 있어서 한국 개신교의 대표적인 기구로 자리매김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런데, 다일공동체가 그렇게 많은 사회봉사를 국내에서 해외에서 감당할 수 있게 된 배경에는 영성운동으로서의 다일공동체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이 논문에서는 한국 기독교 영성운동의 관점에서 다일공동체를 살펴보려고 한다.



(1) 다일공동체 운동의 출발과 목표: 나사렛 예수의 영성



다일공동체의 영성을 최일도 목사는 한 마디로 “나사렛 예수의 영성”이라고 요약한다. 그는 이 분류가 리처드 포스터의 영성 운동 분류 가운데 “성육신의 전통”에 해당한다고 규정한다. 성육신의 영성 전통이란 “기독교 영성의 근간이 되는 예수, 그것도 육화하여 이스라엘 나사렛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나 성장하였으며, 시골뜨기들과 더불어 시장바닥을 뒹굴며 하나님의 나라를 말로 행동으로 선포하셨던 예수에 보다 더 주목하”는 영성이다. 따라서, 최일도 목사에 의하면, 영성생활이란 “하나님이 어떠한 분인지를 우리에게 알려주신 주 예수를 인생의 길잡이로 삼아 살아가는 삶”이고, 나사렛 예수의 영성이란 “예수의 정신, 예수의 사역, 예수공동체에 주목하는 영성”을 말한다. 최일도 목사는 이런 영성의 모범으로 샤를르 드 푸코와 아씨시의 프란치스코를 들고 있다. 특히, 이 두 영성가의 기도문들은 다일공동체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기도문들이 되었다.



최일도 목사가 “나사렛 예수의 영성”을 구체적으로 실천하게 된 계기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는 그의 자서전 <밥 짓는 시인, 퍼주는 사랑>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두 번 언급한다. 첫 번째는 하루 종일 청량리 역전에 쓰러져 누워있던 할아버지를 보는 순간, 그의 마음에 들려온 음성이다: “아니, 아직 먹지 못했다. 일도야, 너는 언제까지 나를 이 차가운 길바닥 위에 눕혀놓을 작정이냐?” 그는 이 음성에 이어서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고, 이들에게 하지 않은 것이 내게 하지 않은 것이다” (마25:40)라는 말씀이 떠올랐고 이 사건이 그에게 생의 전환점이 되었다고 말한다. 그 음성을 들은 후로, 최일도 목사가 청량리에서 노숙인들에게 라면과 밥을 나누는 삶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두 번째 음성은, 중풍에 걸린 목사 사모님을 한 카톨릭 무료 병원에 데려갔다가 거절당한 후에 들은 음성이었다: “일도야, 나의 대책은 바로 너다. 일도야, 너는 어느 때까지 나에게 대책을 묻고 따질 거냐. 나의 대책은 바로 너 자신이다. 일도야, 어느 때까지 너는 나를 차가운 땅바닥에 눕혀 놓을 셈이냐. 어느 때까지...” 최일도 목사는 이 음성은 청량리에서 함경도 할아버지를 처음 만났을 때 들었던 그 음성을 다시 생각나게 할 정도로 충격적이었다고 술회한다. 이 일 후에 개신교 무료병원인 천사병원을 세우자는 운동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최일도 목사는 이처럼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과의 만남을 나사렛 예수와의 만남으로 믿고 예수님을 섬기듯 그들을 섬기려고 했다. 이처럼 그의 하나님 경험의 특징은 신비적인 기도 속에서가 아니라 삶의 현장 속에서 구체적으로 일어났다는 점에 있다.



(2) 다일공동체 운동에서 사회봉사와 영성훈련



다일공동체의 사회봉사는 “어떻게 예수님처럼 사는가?”라는 큰 질문에 대한 한 응답으로 자리하고 있다. 최일도 목사는 다일공동체를 소개하는 한 글에서 다음과 같이 다일공동체의 주요관심사에 대해 말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다일하면 도시빈민을 섬기는 현장으로 생각합니다. 다일하면 밥 퍼 주는 곳으로만 알고 있지요. 물론 중요한 일입니다. 굶주리는 사람들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라도 달려가서 밥을 퍼주겠다는 것이 다일의 밥퍼 정신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주된 관심 작업이긴 하지만 다일이 지향하는바 전체는 아닙니다. 분명하게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일이 우선이 아니고 사람이 우선이라는 것입니다.

10년 동안 한 사람의 헌신된 형제를 길러내는 것이 궁극적인 관심이었고, 그 마음은 지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공동체를 살기로 서약한 가족들이 매일매일 “어떻게 예수님처럼 사는가?”하는 하나의 목표를 향해서, 모이면 믿음으로 기도하고 나사렛 예수의 영성생활을 구체적으로 실천에 옮기며 살기로 다짐하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일은 하다가 지치면 그만할 수도 있습니다. 아직까지는 약속으로 정한 날엔 18년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밥을 퍼왔습니다. 하지만 일은 우리가 아니더라도 다른 사람들이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밥을 꼭 다일이 퍼야 한다는 생각은 애초부터 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함께 살면서 공동체성을 회복한다는 것은 다일이 해내야 할 사명입니다. 다일에게 하나님께서 맡기신 이 시대의 과제로 믿겠습니다.



다시 말해서, 다일공동체는 예수님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의 공동체를 세우는 것을 가장 지향하는 영성운동인 것이다. 도시빈민을 위한 봉사 사역을 포함해서 다른 모든 활동들은 예수님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이 하는 활동으로서 자연스럽게 우러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다일공동체 영성운동에 담긴 몇 가지 특징을 기독교영성의 관점에서 다음과 같이 평가해볼 수 있다. (*이 부분은 이전에 썼던 "다일공동체의 영성"이란 글을 옮기고 보충하였다.) 첫째, 다일공동체는 영성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인 기도와 실천 또는 관상과 실천 (contemplation and action)의 균형을 잘 잡고 있다. 균형 잡힌 영성은 기독교영성사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 중 하나이다. 모든 존경받고 신뢰받는 영성가들은 기도와 실천에 균형이 잡혀있다는 특징이 있다. 혹자는 사막의 영성가들이나 봉쇄수도원의 영성가들이 세상을 도외시하지 않았는가하고 의문을 던지지만, 그들 역시 기도를 통해 교회의 일치와 세상의 정의를 위해 얼마나 많은 직접적이고 간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는지 알 수 없다. 끌레르보의 버나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에 관한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깊이 있는 신비기도 체험의 소유자였지만, 부와 권력으로 타락한 수도원을 개혁하고 교회를 하나 되게 하는 실천에도 큰 역할을 했다. 아씨시의 성프란치스코는 탁발수도회의 창시자로서 세상 속을 다니며 가난한 이들과 함께 살았지만, “태양의 노래”와 같은 기도문에 담겨있는 그의 기도의 깊이는 어느 사막 영성가, 봉쇄 수도원의 영성가 못지 않다. 다일공동체는 영성생활수련원을 통해 기독교영성사의 기도생활 즉 관상생활의 맥을 잇고 있는 한편, 밥퍼식당과 천사병원 및 중국, 필리핀, 베트남, 캄보디아 등지에 있는 공동체의 사역을 통해 기독교영성사의 실천 즉 구제긍휼사역의 맥을 잇고 있다.



둘째, 다일공동체 영성운동은 기도와 실천의 균형을 잡고 있을 뿐만 아니라, 기도와 실천 그 각각에 있어서도 기독교 영성사에 기반한 바른 기도의 길, 바른 실천의 길을 제시하려고 노력한다. 대다수 한국개신교인에게 “기도”는 무엇인가? 그 형식에 있어서는 소리를 내서 하는 구송기도로서 집단적 통성기도와 대화식기도를 주로 사용하고 있다. 내용에 있어서는 “주시옵소서!”를 강조하는 청원기도가 주를 이루고 감사기도와 찬양기도가 보태지고 있다. 기도의 도입으로서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큐티 (Quiet Time) 또는 찬송하기가 사용되고 있다.



하지만, 기독교 영성의 전통에는 훨씬 깊이 있고 다양한 기도에 대한 이해와 방법들이 있다. 우선, 내 생활의 필요를 채우기 위한 청원기도는 기도의 주목적이 결코 아니다. 기도의 주목적은 “하나님과의 일치”에 있다. 하나님을 온 마음과 정성과 뜻과 힘을 다해 사랑하는 마음을 불러 일으키고 하나님의 마음과 내 마음이 하나 되는 것이 기도의 목적이다. 그리고, 기도에 있어서 소리는 극히 일부를 차지할 뿐이다. 기도의 대부분은 침묵이다. 말을 하기 보다는 듣는 것이 기도인 것이다. 기도의 시작은 성경묵상, 기도문암송, 성화관상, 자연묵상 등에서 시작한다. 기도 시간에는 성경묵상을 머리로 연구하고 따지기 보다는 가슴으로 다가오는 말씀을 찾으려고 애쓴다. 시편이나 영성가들의 기도문은 좋은 기도의 안내자가 된다. 성화 (icon)를 보면서 떠오르는 이미지나 느낌을 가지고 기도를 시작하기도 한다. 나무나 풀, 시냇물소리가 기도의 좋은 안내자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 모든 기도의 수단들은 하나님과 머리로 만나는데서 그치지 않고, 가슴으로 만나도록 이끄는 수단일 뿐이다. 이 기도의 수단들을 넓은 의미로 영성훈련이라고 할 수 있다. 다일영성생활수련원에서는 기독교영성사에 바탕을 둔 침묵기도, 예수호칭기도 (Jesus Prayer), 거룩한 성경 읽기 (Lectio Divina), 자연묵상 등을 소개함으로써 한국개신교인들의 기도에 깊이와 넓이를 더해줄 수 있는 좋은 기회들을 제공하고 있다.



다일의 영성은 바른 기도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을 할 뿐만 아니라, 바른 실천이 무엇인가를 질문하고 있다. 다일공동체가 처음 출발하던 80년대 시절만 해도, 복음주의적 기독교인은 실천이라고 하면 개인영혼구원을 위한 복음전도와 선교 이외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미국의 대표적인 복음주의 목회자이자 한국 복음주의 교회에도 큰 영향을 끼친 빌하이벨스 목사의 고백을 필두로, 교회의 양적 성장만을 목표로 한 복음전도와 선교는 영성의 천박성과 함께 그 한계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한편 진보적 기독교인은 민중신학적 이념에 기반한 사회정의를 위한 운동만이 진정한 실천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하나님을 만나려고 하는 영혼의 갈증을 채워주지 못하는 실천은 그 명분이 아무리 올바르다고 해도 역시 그 한계를 보이고 말았다. 다일공동체는 말로만 전하는 복음전도와 선교가 아니라, 청량리 윤락가 한복판에서 살면서 노숙인, 독거노인들에게 밥을 퍼주고 “언니들”을 감동시키며 말이 아닌 몸의 언어로 복음을 전했다. 또 다일공동체는 운동권의 머리가 아니라 “생활권”의 가슴으로 사회의 밑바닥 생활에서부터 나오는 진정한 부르짖음을 대변했다. 다일공동체의 바른 실천에 대한 이런 끊임없는 질문과 응답이 오늘 복음주의적 기독교인과 진보적 기독교인의 공감을 동시에 얻을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셋째, 다일공동체 영성운동은 한국적 영성과 서양 기독교 영성을 적절하게 통합하고 있다. 다일공동체는 기독교 영성사에 있는 영성훈련의 방법들에 관심을 가질 뿐만 아니라, 현대 기독교 공동체들에도 관심을 갖고 교류를 하고 있다. 떼제 공동체와 브루더호프 공동체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교회의 본질이 공동체성에 있을 뿐만 아니라, 현대사회의 치열한 경쟁 속에 상처받은 이들을 치유할 수 있는 길은 공동체성의 회복에 있음을 깊이 인식했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다일의 영성은 한국적 영성이다. 영성이 자기 중심성과 이기적 욕심을 초월해 하나님을 만나는 경험을 다룬다고 할 때, 그 경험은 다분히 기도하는 사람의 문화와 긴밀한 관련을 맺고 있다. 한국 기독교인이 “은혜 받았다”고 말하는 경험과 서양 기독교인이 영적 감동을 받는 경험은 상당히 다르다. 문화심리학자들은 그 이유 중 하나로 서양인들의 자아 (self) 와 한국인을 포함한 아시아 사람들의 자아가 다르다는 것을 든다. 서양인의 자아는 독립적 (independent) 이고 개인적 (individualistic) 인 반면, 한국인의 자아는 관계적 (relational) 이고, 의존적 (interdependent) 이고, 집단적 (collective) 이다. 한국인은 관계로 매이고 관계로 푼다. 관계에서 오는 한국인의 상처는 서양인에 비해 무척 심각하다. “화병”은 한국인의 문화에서 발생하는 고유한 병이라고 세계의학사전에 등재되어 있다. 다일영성생활수련 1단계 “아름다운 세상 찾기”에서 “화”의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루게 된 것도 “화”를 생성하게 되는 관계가 한국인에게 얼마나 심각한가를 인식했기 때문일 것이다. “화”의 문제를 해결하고 치유 받는다면 한국인의 인간관계의 많은 문제들이 해결될 수 있다. 아울러, 인간관계와 직결되어 있는 하나님과의 관계 역시 더욱 원활한 소통을 경험할 수 있게 될 것이다.



한국인의 화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뿐만 아니라, 다일 영성의 한국적 특성은 “밥”이라는 낱말에 잘 담겨 있다. 다일의 영성은 “빵”의 영성이 아니라, “밥”의 영성, “진지”의 영성이다. 청량리의 “밥퍼무료식당”에서 매일같이 최상의 쌀로 지어져서 나누어지는 “밥”에 다일의 영성이 담겨 있다. 또한, 다일공동체의 식사시간마다 드려지는 “진지기도”에 다일의 영성이 담겨 있다. 아울러, 다일 영성생활수련때 행해지는 “진지 알아차리기”에 다일 영성의 핵심이 담겨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내 진지 상에 오른 알곡들, 채소들과 고기들의 색깔, 크기, 모양을 알아차리고, 그 안에서 예수님을 만날 뿐만 아니라, 나 역시 “이 밥 먹고 밥이 되어 살겠습니다”라고 눈물을 흘리며 결심하는 모든 경험이 지극히 친근한 한국적인 경험인 것이다.



넷째, 다일공동체의 영성생활수련은 수련자들을 자원봉사자로 양성하는 통로의 역할을 하고 있다. 다일공동체 영성생활수련은 1단계 “아름다운 세상 찾기”, 2단계 “작은 예수 살아가기”, 3단계 “하나님과 동행하기”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대중을 향하여 열린 영성훈련의 장이다. 또한, 다일DTS (Discipleship Training School)와 다일STS (Servant Leadership Training School)은 6개월과 1년의 긴 기간동안 “노동을 기도로, 기도를 노동으로” 사는 법을 훈련하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이 영성훈련들을 경험한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방법으로 다일공동체의 사회봉사활동을 후원할 뿐만 아니라 자원하여 봉사자로 참여하고 있다. 다일공동체의 영성훈련이 거기에서 살아가는 공동체 가족뿐만 아니라 공동체 밖의 사람들에게 어떻게 나사렛 예수의 영성생활을 흘러넘치게 하는지를 잘 보여주는 예이다.



마지막으로, 다일의 영성은 그 이름 그대로 “다양성 안에서 일치”를 추구하는 영성이다. 다름이 곧 틀림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다일공동체는 내 기준과 고정관념으로 나하고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하기 전에, 다름에서 오는 개성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려고 한다. 그 다름을 아름답게 조화시킬 수 있는 일치점을 발견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다일의 영성이 지향하는 바이다. 특히, 화해와 일치의 추구는 갈래갈래 찢기고 분열된 현대 한국 사회와 한국 교회를 볼 때 참 중요한 한국적 영성훈련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할 수 있다.



5. 결론



이상으로 이현필 선생을 통해 시작된 귀일원 영성운동과 최일도 목사를 통해 시작된 다일공동체 영성운동이 사회봉사를 어떻게 접근하는 지를 살펴보았다. 두 운동들이 시대적 공간적 차이는 있지만, 예수를 따라 살려고 하는 성육신 영성에 기초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인격에 초점을 맞추는 영성은 기독교 영성사의 오랜 전통에 잇닿아 있으며, 현대 한국 기독교가 오순절 영성의 영향으로 외적 은사에 주로 관심을 갖는 것에서 오는 영적 치우침을 바로잡을 수 있는 대안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두 운동 모두 대단한 사회봉사활동을 펼치고 있는데, 오히려 그 활동이 중심이 아니라 영성훈련과 영성생활이 중심이 되고 있다는 점도 공통점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를 사랑하고 따라 살려고 하다보니까 자연스럽게 사회봉사를 할 수 밖에 없는 흐름을 보이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귀일원 운동과 다일공동체 운동은 기도와 실천에 있어서 균형 잡힌 모습을 보여준다. 영성에 있어서 기도와 실천의 균형은 바른 영성을 분별하는 시금석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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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1] 이현필 선생의 설교문,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신 예수 그리스도”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살아 계시고 우리를 사랑하심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신 자신이 먼저 몸소 그 사랑을 받으시고 그 사랑을 믿고 사셨습니다. 아버지께서 살아계심을 믿었기 때문에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을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우리 즉, 그 당시 제자들과 모든 사람에게 보이려 하셨습니다. 아무 걱정없이, 아무 일하지 않아도 아버지의 뜻만 순종하면 잘 살아지고 영원히 살아지는 것을 보이시려 하신 것이 그의 교훈의 중요한 목적이십니다. 예수를 믿고 그의 교훈을 받아서 선한 사람이 된다는 것은 그 다음으로 반드시 이루어질 사실이고, 첫째 목적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아시고 믿으실 뿐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를 깊이 사랑하셨습니다. 아버지를 사랑하시는 일이 사람들을 가르치시고, 꾸짖으시고, 사람들의 병을 고치시고, 가난하고 약한 이를 돕고, 죽은 이를 다시 살리시는 일로 나타나신 것입니다. 아버지를 간절히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런 일이 되어진 것이지, 그런 일을 하시는 것이 중요한 목적이 아니었고, 처음부터 그 일을 하시려던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믿고 그리스도의 교훈을 참말로 알아 하나님 아버지의 살아 계심과 우리를 참으로 사랑하심을 믿을 때에, 우리 마음과 생활이 깨끗해지는 변화가 올 것입니다. 우리가 깨끗해지려 함으로써 깨끗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아버지가 항상 같이 계시고, 우리를 보호하시고, 우리를 눈동자처럼 아끼심을 믿고 깨달으면 마음에 힘이 생기고, 죄를 이길 힘이 오고, 기쁨과 소망이 새로워지고, 힘이 있고, 자신이 있고 소망과 기쁨이 표현되는 생활을 이루어 도덕적으로도 완전해져 갈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현존하심과 그의 깊으신 사랑은 모르면서 생활만 고쳐보려 애쓰는 것은 허사요, 헛 꿈이요, 헛 세월만 보내는 결과가 되고 말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죽는 일에까지 아버지의 살아 계심과 그의 사정만 알고 평안할 때 즉, 그 괴로움에 대항하거나 도피하거나 변명하지 않을 때 아버지의 참되신 능력과 보호와 사랑이 홍수처럼 흘러내려올 것입니다.



둘째로 이적과 기적을 바라서 참 권능을 받는 것이 아니고, 아버지의 사랑과 그의 극진하신 보호에 감격하여서 아버지를 사랑해보고 싶을 때에 필연적으로 주시는 것, 그 필요에 응해 주시는 것이 이적과 기적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병자를 보면 아버지의 자비를 알리고 싶을 것이고, 약한 이를 보면 아버지의 능력과 힘과 구원을 보이고 싶고, 가난하고 빈핍한 이에게 아버지의 무한한 품성을 나타내고 싶은 마음 즉, 아버지의 사랑을 자기가 체험해서 깨달은 다음에는 만민을 한결같이 그 풍성하신 사랑과 권능을 사람들에게 알리고 사람들이 그 은택을 입고,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고 싶은 간절한 마음에 권능으로 그 요구를 채워주심으로 아무 힘도 없던 이가 다른 이까지 도와주게 되고, 아무 것도 가지지 않았으나 여러 사람을 부요케 하고 원수까지 사랑하며, 도덕적으로 아무 능력도 없던 이가 다른 사람까지 새로운 생활로 변화를 일으키는 큰 권능을 행하게 되는 것이지, 처음부터 이적이나 기사를 바라던 것은 아닙니다.



먼저 아버지를 사랑치 않고 구주의 사랑도 깨닫지 못하고는 이적과 기사는 온갖 요술이고 사기입니다. 올바른 신앙의 태도는 첫째로는 아버지의 사랑과 권능을 믿어 체험하고, 둘째로 그의 사랑과 권능을 믿어 마음에 아버지를 사랑하고 아버지만 영화롭게 높이 찬송하려는 간절한 마음이올시다.



주 나의 하나님이시여 내가 전심으로 주를 찬송하고 영영토록 주의 이름에 영화를 돌리오리니 이는 내게 향하신 주의 인자가 크사 내 영혼을 깊은 음부에서 건지셨음이니이다 (시 86: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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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2] 다일공동체 진지 기도



한 방울의 물에도

천지의 은혜가 스며 있고

한 톨의 곡식에도

만인의 땀이 담겨 있습니다.

이 땅에 밥으로 오셔서

우리의 밥이 되어

우리를 살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우리도 이 밥 먹고 밥이 되어

다양성 안에서 일치를 추구하는 삶을 살겠습니다.

밥상을 베푸신

하나님 은혜에 감사드리며

맑은 마음, 밝은 얼굴, 바른 믿음, 바른 삶으로

이웃을 살리는 삶이기를 다짐하며

감사히 진지를 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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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다일교회 20년사 편찬위원회. <교회의 교회다움을 위하여: 목회자료로 보는 다일교회 20년사>. 경기도 남양주: 다일교회, 2009.



엄두섭. <맨발의 성자>. 서울: 도서출판 은성, 1992.



엄두섭. <순결의 길, 초월의 길>. 서울: 은성, 1993.



엄두섭. <영맥>. 서울: 은성, 1995.



엄두섭. <호세아를 닮은 성자>. 서울: 은성, 1993.



이강학. “다일공동체의 영성.” <다일의 영성과 신학: 다일공동체 창립 20주년 기념 논문집>. 경기도 가평: 도서출판 다일, 2008.



이영재. <한국적 기독교 영성에 관한 연구: 이현필 선생을 중심으로>. 호남신학대학교 목회학박사 논문 (2002).



임성빈. “다일공동체의 문화사적 의미”. <다일의 영성과 신학: 다일공동체 창립 20주년 기념 논문집>. 경기도 가평: 도서출판 다일, 2008.



최일도. <밥 짓는 시인, 퍼주는 사랑>. 경기도 가평: 도서출판 다일,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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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Korean Christian Spirituality and Social Service



Lee, KangHack, Ph.D. (Graduate Theological Union)



This paper studies the relationship between Korean Christian spirituality and social service. First, it deals with the definition of Christian spirituality. Using the definition of spirituality by Sandra Schneiders, this paper explores various aspects of Christian spirituality. Second, based on the definition, it develops how Christian spirituality relates to social service. Finally, this paper explores two representative Christian spiritual movements, Guiilwon and Dail Community, focusing on its beginning, its perspective on social service, and spiritual practices. In sum, for both movements, the motivations are to love and follow Jesus Christ and all their activities including social service have been naturally flowed from those motivations.



Key Words: Korean Christian Spirituality, Social Service, Incarnational Spirituality, Guiilwon, Lee Hyun-Pil, Dail Community, Choi Il-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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