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ngJo BBS


작성자
정재상
날짜
15/02/23 16:53

Hit

2731
제 목
 보편적 성소의 관점에서 비추어본 신비체험의 본질 (고계영신부)
첨부파일
 f129-15-02-23.doc (275 K)
 
 

보편적 성소의 관점에서 비추어본 신비체험의 본질
- 칼 라너의 신비 신학을 중심으로 -

고계영(작은 형제회)

20 세기의 신비 박사(doctor mysticus) 및 신비 신학의 스승이라 불리우는 칼 라너(Karl Rahner, 1904-1984) 는 인간 존재를 하느님의 신비를 지향하는 신비, 즉 신비인(homo mysticus)으로 규정하면서, 내일의 크리스천은 신비가이든지 아니면 크리스천이 아니든지 둘 중의 하나가 될 것이라는 예언적인 말을 남겼다 . 사실, 그리스도교의 핵심 교의들, 예를 들면, 삼위일체의 신비, 창조의 신비,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 신비(육화의 신비, 공현의 신비, 십자가의 신비, 죽음의 신비, 부활의 신비, 승천의 신비, 성령 강림의 신비), 은총의 신비, 계시와 믿음의 신비, 교회의 신비, 사랑의 신비, 성체의 신비, 마리아의 신비 등은 모두 신비이기 때문에, 신비 체험을 하지 않으면, 크리스천이라고 불릴 수 없을 것이고, 이런 관점에서 신비 체험은 크리스천 체험의 중심에 자리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렇게 신비 체험이 크리스천 체험의 본질이라면, 신비 체험은 관상 수도자들이나 특별한 은사를 받은 소수의 크리스천들에게만 주어진 특별하고 예외적인 은총이 아니라, 모든 이의 구원을 위하여 모든 이에게 주어진 보편적인 은총이 되며, 이런 뜻에서 신비 체험은 모든 크리스천들이 걸어가야 할 보편적 성소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여러 가지 차원에서 전환기였던 지난 세기는 영성 신학에 있어서도 보편적인 지평에서 “신비체험”(la mistica) 의 본질이 새롭게 조명된 전환기로, 이 전환은 100년에 걸쳐 다양하고 격렬하게 전개되었던 신비체험의 긴 논쟁을 통하여 이루어졌으며, 이 논쟁에는 영성신학자들뿐만 아니라 20세기의 내로라하는 신학자들과 철학자들도 상당수 참여하였다. 이들 가운데 칼 라너는 철학적이고 신학적인 차원에서 신비체험의 보편성을 밝혀내고 체계화시킨 대표적인 신비 전문가이다. 그러기에 20세기의 신비 신학 논쟁이나 신비체험의 보편성을 논할 때 칼 라너의 기여를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 이 논문에서는 지난 세기에 펼쳐졌던 신비신학 논쟁을 간략히 소개하면서 라너가 초월 사상 위에 정초한 신비 신학의 중심 사상을 요약할 것이고, 라너의 사상을 주요 토대로 하여 보편적 성소의 관점에서 신비체험의 본질을 고찰할 것이다.
1. 20세기에 전개된 신비체험 논쟁
신비는 가장 명백한 실재이지만, 비주제적이고 비범주적인 무한 실재이기 때문에, 이 객관적 실재는 범주적이고 역사적인 인간의 체험 안에서는 대단히 주관적인 형태로 나타난다. 신비 체험의 이러한 주관성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교 역사를 통하여 신비 체험에 관한 논쟁이 여러 차례 일어났으며, 그 가운데 하나가 17세기 프랑스에서 전개되었던 캉브래(Cambrai)의 대주교 프랑소와 페늘롱(François Fénelon, 1651-1715)과 모(Meaux)의 주교 쟉 보쉬에(Jacques Bossuet, 1627-1704) 사이의 논쟁이다 . 이 논쟁은 불행히도 신비 체험을 올바르게 이해했던 페늘롱 대주교가 1699년 교황청으로부터 단죄를 받고 신비체험에 대해 부정적인 이미지를 지니고 있던 보쉬에 주교가 승리하는 것으로 종결됨으로써 , 이후 가톨릭 교회는 그 부정적 여파로 약 2 세기에 걸쳐 신비가들이 몰락하고 왜곡된 신비 체험의 개념이 교회를 지배하게 되는 비극을 겪게 되었다 . 신비 체험과 관련된 이러한 왜곡된 상황은 20세기 초를 전후하여 도미니코회의 오귀스트 소드로(August Saudreau, 1859-1942)의 연구를 통해 비로소 수정되기 시작하였으며, 그의 신학적 노력은 예수회의 오귀스탱 프랑소와 풀랭(Augustin-François Poulain, 1863-1919)의 비판을 야기시켜 논쟁으로 비화되었으나 , 그후 격렬하게 펼쳐진 신비 신학의 토론을 거쳐 오히려 신비 체험의 보편성이 올바르게 정립되는 좋은 전기가 되었다 .
소드로와 풀랭이 논쟁한 주요 주제들 중 하나는 관상에 대한 이해, 특히 습득 관상과 주입 관상을 구별하는 문제였다. 소드로는 무엇보다도 참된 신비적 일치 안에서 완덕을 실현하기 위해 영혼이 지향하는 방향에 몰두하였다. 전통과 영적 스승들의 글들을 따르면서, 소드로는 영적 혼례에 대한 신비 체험으로 꽃피어나는 길은 단 하나이며, 모든 영적인 길은 필연적으로 가장 낮은 단계로부터 가장 높은 단계, 즉 하느님과의 신비적 일치로서의 주입 관상에로 나아간다고 주장하였다 . 이 도미니코 학자에 의하면, 주입적이고 신비적인 관상은 완덕을 지향하는 크리스천 삶의 정상적인 목표이다. 따라서 신비체험은 완덕에 있어서는 본질이 되며, 모든 크리스천에게 있어서는 의무적으로 걸어야 할 길이 된다. 이와 같이 소드로는 습득 관상과 주입 관상의 구별을 비판하고, 이러한 구별은 16-17세기 이후 전개된 반(反)-신비주의 운동으로 말미암아 신비체험의 고전적 작품들을 잘못 이해한 것이라 규정하면서, 신비적 기도의 경계를 확장하였다 . 신비체험의 보편성과 더불어 소드로는 또한 신비 체험 중에 일어나는 특별한 현상들은 관상 생활의 정상적인 과정에서 부수적으로 따라오는 예외적인 현상들에 지나지 않으며, 신비적 단계를 규정하는 것은 바로 하느님으로부터 직접 받은 수동적 사랑임을 강조하였다 .
소드로의 관점을 비판한 첫 번째 신학자는 풀랭으로, 그의 주장은 예수회의 영성 전통 위에서 새롭게 이루어지고 있던 심리학적 연구의 도움을 받아 힘을 얻게 된다. 이 예수회 신학자는 신비적 단계들을 밝히고자 시도하면서, 공통 기도의 네 과정들로부터 신비적 일치의 기도에 나타나는 네 과정들까지 기도의 발전 여정을 체계화 한다. 이러한 학문적 작업을 위해 풀랭은 사변적 학파를 비판하면서 경험적 방법을 채택하는데, 이는 신비적 여정에서 유익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분하는 데에 기여한다 . 그에 의하면, 참된 신비적 기도는 모든 인간적 노력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인간 주체 쪽에서의 협조가 전혀 없이 오로지 수동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순수 은총에 의해 이루어진다. 이를 기준으로 그는 공통 기도의 네 번째이자 마지막 단계인 단순 기도, 즉 습득적이고 능동적인 관상과, 신비적 일치의 등급들을 특징짓는 주부적이고 수동적인 관상을 명료하게 구별한다 . 그러면서 습득적이고 능동적인 관상이 일반적이고 빈번하게 일어나는 관상이라면, 주부적이고 수동적인 관상은 드물게 일어나는 특별한 관상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풀랭에 의하면, 신비적 상태는 완덕에 이르기 위한 필수적인 요소가 아니게 된다. 신비체험의 성소는 보편적인 것이 아니라 구원에 반드시 요청되는 크리스천 완덕에 덧붙여지는 하나의 특수한 은총일 따름이라는 것이다 .
소드로와 풀랭의 논쟁으로 시작된 신비 체험에 관한 토론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에 특히 더 격렬하게 전개되었다. 여러 신학자들이 풀랭의 입장을 지지하였으며 , 예수회 학파와 카르멜 학파에서 주도하는 잡지들도 풀랭의 견해를 옹호하였다. 그리고 아빌라 테레사 학파는, 십자가의 요한과 아빌라의 테레사의 신비 체험에 쉽게 다가갈 수 있는 길을 제시한 풀랭을 토대로 신비체험을 “대중화” 하고자 애썼으나 , 신비체험의 “엘리트적인” 경향으로 인해 거센 비판을 받기도 했다.
소드로의 입장은 더 많은 신학자들로부터 지지를 받았고 , 『Revue Augustinienne』, 『Études Franciscaines』, 『Revue Tomiste』, 『Collationes Brugenses』 같은 잡지들은 소드로와 같은 사상적 노선에서 수덕적 길과 신비적 길의 연속성을 강조하였다. 소드로의 신학적 입장은 베네딕토회원들, 아우구스티누스회원들, 도미니코회원들, 프란치스코회원들, 예수회원들 등 자신들의 회헌을 다시 읽은 수도자들에 의해서 폭넓게 지지되었다 .
신비 신학에 관한 논쟁이 심화되면서 수덕학과 신비학의 관계도 분명하게 밝혀지게 되었다. 영성의 역사를 분석 연구한 가리구-라그랑쥐(Réginald Garrigou-Lagrange, 1877-1964)는 크리스천 완덕은 신비적 삶 안에서 초자연적으로 작용하시는 성령의 선물에 의해 성장된다는 사실을 논증하는 가운데 수덕학과 신비학의 연속성을 강조하였다. 이런 관점에서 그는 기적이나 환시 그리고 예언으로 대표되는 초자연성보다, 은총과 믿음과 사랑과 성령의 삶이 더 본질적인 초자연성이라는 사실을 역설하였다. 그리고 수덕학과 신비학은 한 신학에서 갈라져 나온 두 개의 줄기가 아니라 동일한 영적 삶에서 펼쳐지는 하나의 과정이라 결론짓는다. 수덕학과 신비학의 이러한 계속성은, 주입 관상에서 정점에 이르게 되는 크리스천 완덕의 길은 오로지 하나라는 사실에 기초를 두고 있다.
수덕학과 신비학의 본질적 일치 문제와 신비체험의 보편적 성소 문제에 대한 신학적 수렴은 ‘영성 신학’에 대한 관심을 일깨워 주었고, ‘영성 신학’의 본질, 방법 및 구조의 문제들, 특히 ‘영성 신학’이 일종의 학문인지 또는 실천적인 수련 분야인지에 대한 토론도 촉진시켰다 . 토론 결과 영성 신학은 수련 과목으로 규정되었으며 , 그 목표는 모든 크리스천들의 성소인 성덕, 즉 “신화”(神化, divinizzazione)로 제시되었다. 즉, ‘영성 신학’은 점진적인 그리스도화를 통하여 인간이 하느님으로 변화되는 것을 촉진시키는 것으로 이해하게 된 것이다 . 영성 신학에서 지향하는 이러한 성화에로의 부르심은 신비체험의 보편 성소와 일치한다. 이와 같이 신비체험에 관한 논쟁을 통하여 지난 세기에 영성 신학은 수덕학과 신비학을 분리하거나 대립시키는 결함을 넘어서서 이 두 분야를 모두 포괄하는 실천 신학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40년대의 “새로운 신학”(nouvelle théologie)과 5·60년대의 “초월 신학”(teologia trascendentale)의 출현으로 신비 체험에 관한 토론은 교의신학적 차원으로 한층 더 발전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작 마리탱(Jacques Maritain, 1882-1973), 예수회의 앙리 드 뤼박(Henri de Lubac, 1896-1991), 버나드 로너간(Bernard Lonergan, 1904-1984), 칼 라너(Karl Rahner, 1904-1984)의 신학적 기여는 특별히 기억할 만하다. 이들을 위시하여 여러 신학자들의 노력으로 신비체험에로의 보편적인 성소는, 비록 간접적이긴 하지만,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문헌들을 통해 공식적인 지지를 받게 되며, 이로 말미암아 신비 신학 논쟁은 새로운 전환을 맞게 된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회헌장」을 통하여 “교회 안에서 모든 이는 교계에 소속된 사람이든 교계의 사목을 받는 사람이든 다 거룩함으로 부름 받고 있다” 고 선언하는데, 이 문헌에서 말하는 ‘거룩함’은 「교회헌장」40항에 나오는 그리스도교 생활의 완성과 사랑의 완덕을 의미한다 . 이렇게 공의회 문헌이 선언하는 ‘그리스도교 생활의 완성과 사랑의 완덕’이나 ‘거룩함’은 신비체험의 보편성을 주장하는 신학자들이 규정하는 신비 체험의 핵심 개념과 동일하다. 따라서 모든 이가 거룩함에로 불리었다는 공의회의 선언은 신비체험에 대한 보편적 성소를 간접적으로 확인해주는 것이라 말할 수 있다 .
20세기말에 접어들어 버나드 맥긴(B. McGinn)은 『서방 그리스도교 신비주의의 역사』를 저술하면서 그 첫째권 부록에서, 아직 구체적인 내용들에 대해서는 의견의 일치가 이루어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신비체험은 크리스천 완덕에 있어 특별하거나 엘리트적인 형태를 띠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삶 자체가 요구하는 것이라는 사실에 대해 (적어도 가톨릭 안에서는) 어느 정도 일치를 보고 있다”고 결론짓는다 . 맥긴의 지적대로, 아직도 신비체험에 관하여 밝혀져야 할 논점들이 상당히 남아 있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20세기는 신비체험의 보편성이 신학적으로 확보되었던 전환의 시기였고, 그런 점에서 지난 세기는 신학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평가할 수 있겠다.
2. 칼 라너의 신비 신학
철학과 신학을 넘나들며 20세기 가톨릭 교회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칼 라너는 신비체험의 역사적이고 이론적인 측면, 즉 신비 신학에도 큰 관심을 쏟았으며, 방대한 신학 저술을 통해 토마스 아퀴나스는 물론이고, 칸트, 헤겔, 마레샬, 하이데거에 의해 발전된 존재론의 관점에서 크리스천 신비체험의 고전들, 특히 바뇨레죠의 보나벤투라와 로욜라의 이냐시오를 다시 읽고 이를 중개하고자 노력하였다 . 라너는, 인간 존재의 심연에 신비가 비주제적이며 보편적으로 현존하고 이 신비를 지평으로 모든 인간은 존재론적으로 절대 신비이신 하느님을 지향하는 초월적 존재임을 인간학적, 형이상학적, 기초신학적, 교의신학적 차원에서 밝혀냄으로써 신비체험의 보편성을 한 단계 심화시켜 놓았다. 이러한 그의 신학적 기여는 20세기 신비 신학 논쟁 안에서 가히 독보적이라 하겠다. 라너 신비 신학의 두드러진 특징 가운데 하나는 그가 심혈을 기울여 정립한 초월 신학과 불가분리적 관계에 있다는 것으로, 그가 말하는 초월 체험은 곧 신비 체험이고, 신비 체험은 곧 초월 체험이라 할 수 있다 . 이런 까닭으로 라너의 신비 신학을 고찰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의 초월 신학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으로 요청된다 하겠다.
2.1. 신비 신학의 모체로서의 초월 신학
초월 신학은, 인간의 선험적이고 존재론적인 구조를 분석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계시하시는 하느님과 이를 받아들이는 인간 사이에 존재하는 본질적인 관계를 밝혀주는 신학이다 . 따라서 초월 신학은, 토미즘처럼 하나의 체계를 갖고 신학의 전체를 취급하는 것이 아니라, 전통 신학의 특정 주제들을 초월적 관점에서 숙고하는 신학으로, 이 신학은 순전히 신학적인 문제 설정과 기초적인 신앙 진리들의 인식의 문제에서 신앙인의 주체 속에 존재하는 선험적 조건들을 이전보다 더 명시적으로 주제화한다 . 라너는 이러한 초월 신학을 통해 모든 인간은 자기 자신을 양도하시는 하느님의 초자연적 은총에 의해 존재론적으로 고양되어 있다는 사실을 규명함으로써, 유한한 영으로서 존재하는 인간에 의해 결코 장악될 수 없는 목표로서 이해되는 하느님의 보편적 구원 의지가, 본질적으로 계시가 가능하도록 구조되어 있는 초월 인간 안에서, 역사적으로 중개되는 계시에 대한 초월 체험을 통해 구체적으로 실현된다는 신학적 사실을 체계화해 놓았다.
라너는 하느님의 보편적인 구원 의지에 따라 하느님의 자기 양여로서의 은총과 계시가 어떻게 가능한가를 규명하기 위해 물음을 던질 수밖에 없는 인간의 존재론적인 상황으로부터 출발한다. 그리고 이러한 형이상학적인 물음의 상황을 분석하면서 물음으로 존재하는 인간 안에는 이미 선험적인 인식이 주어져 있고, 이 선험적 인식은 하느님의 초자연적 은총으로서의 계시가 가능하게 하는 전제 조건으로서, 근원적으로 존재와 동일하며, 이러한 존재와 인식의 동일성 은 존재론적 물음으로 존재하는 인간에게 존재 소유의 유비(analogia entis)에 따라 적용됨을 밝혀낸다 .
인식과 존재의 동일성을 바탕으로 라너는 존재 일반에 절대적으로 열려져 있는 인간의 본질을 규명하는 가운데, 인간이 존재론적으로 지니고 있는 영적 본성을 추론해낸다 . 즉, 인간은 존재론적인 물음을 통해 자기 자신과 자기 자신 이외의 존재에로 열려 있는바, 라너는 이러한 인간의 존재론적이고 선험적인 개방성을 ‘영’(spiritus)이라고 규정한다 . 이 ‘영’을 통하여 인간은 선험적으로 모든 것을 “존재의 관점 아래서”(sub ratione entis) 바라보는 가운데 절대 존재에로 열려 있고 , 인간은 그렇게 선험적으로 절대 존재와 관계를 갖는다. 이와 같이 인간 존재 안에는 이미 선험적이고 절대적인 어떤 지평이 존재론적으로 들어와 있으며, 이는 ‘존재론적인 영’인 인간 안에 범주적 대상성을 넘어서는 어떤 초월성이 은폐되어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존재에로의 선험적 개방은 곧 초월에로의 개방이며, 존재에로 열려진 ‘영’으로서의 인간은 곧 초월에로 열려진 인간인 것이다. 이렇게 인간 존재 안에 은폐되어 있는 초월에로의 개방은 근본적으로 초자연적인 하느님의 깊이를 드러내 주는 초자연적 계시가 가능하게 해주는 명제가 된다. 존재에로 열려 있음은 곧 절대 초월로서의 하느님을 향해 열려 있는 것과 동일하기 때문이다 .
절대 초월이신 하느님은 항상 인간에게 ‘영’의 개방성 가운데 은폐되어 있는 분, 미지자로서 남아 계시면서 동시에 이 초월에로 열려진 인간에게 자유로이 당신 자신을 열어 보여주시거나 침묵으로 나타나시는 필연적인 계시의 하느님이시다 . 그리고 절대 초월에로 열려진 인간은 존재론적으로 주어진 영적 본질로 인해, 항상 그리고 본질적으로, 하느님의 이 자유로운 계시를 듣는 존재이다 . 그런데 하느님의 계시는 반드시 인간의 초월과, 그 초월이 범주적으로 실현되는, 역사 안에서 실현된다. 이러한 계시와 역사의 필연성을 바탕으로 라너는 초월에로 열려진 인간을 역사 안에서 하느님의 계시를 듣는 역사적 ‘영’이라 규정한다 . 그런 다음 라너는 이렇게 하느님의 계시를 들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초월성을 인간의 실존 규정으로 해석하면서 인간을 절대 초월을 지향하는 초월이라 정의한다 .
절대 초월을 지향하는 초월로서 인간에게 필연적으로 뒤따르는 귀결은 초월의 체험으로 , 이는 “여러 대상들 가운데 하나로 체험되는, 특정한 개별 대상에 대한 체험이 아니며, 모든 대상적인 체험에 앞서 있으면서 그런 대상적 체험들을 지배하고 있는 근본적인 사실이다” . 다시 말하면, 초월의 체험은 다른 어떤 것으로부터 도출되지 않는 원초적인 특성을 지니며, 이러한 비도출성은 초월 체험 안에 자리하고 있으면서 자신을 드러내는 존재 자체에서 유래된다 . 초월의 체험은 이러한 방식으로 주체가 회피하고자 할지라도 그러한 회피조차 이미 초월적 체험 안에서 실행되기 때문에 초월 체험은 거부되거나 부정될 수 없는 필연성과 보편성을 지닌다 . 이 초월의 체험을 통해서 절대 초월에로 열려진 인간이 진정으로 관계하는 것은 하느님뿐이며 , 이 하느님의 본질을 가장 적합하게 드러내주는 이름은 신비이다 . 이런 차원에서 초월의 체험은 본질적으로 신비 체험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게 되며 , 이렇게 라너 사상 안에서 초월 체험은 자연스럽게 신비체험으로 이어진다.
2.2. 신비 신학의 정체
라너는 초월신학을 바탕으로 신비체험이 기초 신학의 핵심 주제들인 계시, 믿음, 은총, 구원과 본질적인 관계를 갖고 있음을 규명하면서 신비 신학을 새롭게 정립한다 . 즉, 신비체험이란 하느님의 보편적인 구원 의지에 따라 모든 인간에게 주어지는 하느님의 자기 양여 체험이며, 창조되지 않은 은총을 소유함으로써 성취되는 인간의 “하느님됨” (divinizzazione)을 지향하는 성령의 체험이자, 은총을 통한 하느님의 자기 양여로서의 계시 체험이고, 성령 안에서의 믿음 체험이라는 것이다 . 이 신비체험은 하느님에 대한 매개없는 직관 안에서 성취되는 삼위일체 하느님과의 신비적 일치로써 완성된다. 따라서 그의 신비체험은 본질적으로 크리스천 신앙 체험과 동일하며, 교의신학의 한 부분이 된다 . 라너는 이러한 교의신학적 지평 안에서 모든 인간과 관계되는 보편성을 바탕으로 신비 신학을 정립해 놓았다.
1.3.1.1. 신비체험은 하느님의 자기 양여로서의 초월체험이다
하느님은 인간이 다다를 수 없는 무한히 거룩한 신비로 항상 머물면서 동시에 인간의 초월적 실존을 지탱하는 파악할 수 없는 근거로서, 오직 무한한 저쪽에만 머무시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자기 양여를 통해 절대적으로 친밀한 하느님이고자 하신다 . 하느님은 이렇게 끊임없이 자기 양여하는 신비이시며, 무한하고 영원한 이 신비에로 불리움을 받은 인간은 하느님에 대한 매개없는 직관을 통해 이 신비와 하나가 된다. 라너가 교의신학적으로 정립하는 신비체험은 이렇게 자신은 변함없이 무한한 신비로 남아 있으면서 자신의 신적 본질을 양여하시는 하느님에 대한 초월적 체험으로부터 시작된다.
라너에 의하면, 역사적 초월로서의 ‘영’인 인간 존재의 심연에는 초월 체험의 존재론적 지평으로서 하느님의 신비가, 비록 비주제적이고 익명적이기는 하지만, 이미 선험적으로 양여되어 있으며, 따라서 인간은, 역사 안에서 자기를 양여하시는 가운데 신적 본질을 계시하시는, 절대 신비 앞에 자유로운 사랑으로 서 있는 신비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라너는 인간 자체를 하느님의 자기 양여 사건이라 규정한다 . 하느님은 근원적으로 당신 자신의 고유한 신적 실재를 하느님이 아닌 존재에게 내어주실 수 있는 신비적 존재이기에, 무한한 실재와 절대적 신비로서의 당신의 자립성을 잃지 않으면서 자기 양여를 통해 피조적 존재자인 인간의 구성적 원리가 되시고 이 피조물을 온전히 완성시켜 주신다 .
하느님 자신의 존재가 참으로 양도되는 하느님의 자기 양여는 궁극적으로 절대 존재인 신비를 지향하는 영의 초월적 개방성 안에서 역사적으로 구체화되고 , 영적이고 초월적인 인간은 초월적 체험을 통해서 하느님의 자기 양여의 인격적이고 절대적인 신비에 참여하게 되며, 이 참여는 하느님에 대한 매개없는 직관 안에서 인간의 영적 실존이 완성됨으로써 전적으로 성취된다 . 따라서 하느님의 자기 양여에의 참여는 인간 존재가 완성되는 하느님에 대한 매개없는 직관이 가능하기 위한 조건이 되며, 하느님의 자기 양여의 본질과 의의는 영적 주체가 하느님을 직접적으로 만나는 하느님과의 직접적인 친교, 즉 하느님의 신적 본질에 참여하는데 있다 . 이것이 곧 인간 실존의 본질적이고 존재론적인 “하느님-됨”(divinizzazione)으로, 성령의 참여를 통하여 성취되는 인간의 의화 또는 성화와 동일한 것이다 .
인간 존재를 하느님이 되게 하는 하느님의 자기 양여 안에서, 인간의 초월적 지평과 그 대상 사이에는 원초적이고 결정적인 통일이 이루어져 개념적인 구별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다 . 초월의 지평은 인간의 가장 깊은 내면에 존재하는 요소로서 그 자체로 이미 인간 존재의 심연에 선험적으로 자기 양여된 하느님의 신비이며 그분의 자유로운 사랑으로 , 이 안에서 초월의 지평과 초월의 대상은 초월적 체험을 통해 온전히 하나로 일치되고, 이 일치 안에서 초월적 존재는 하느님 안에 있게 되며, 하느님은 초월적 존재 안에 있게 된다 . 이는 초월적 지평을 매개로 하느님과 피조물 사이의 비주제적이고 존재론적인 본질적 관계가 주제화됨으로써, 다시 말하면 초월적 체험을 통해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인식과 사랑이 근원적으로 통일됨으로써, 인간의 영적이고 초월적인 실존이 존재론적으로 완성됨을 의미한다 . 라너는 이와 같이 하느님 자신은 무한한 신비로 변함없이 남아 있으면서, 인간의 실존이 완성되는 신비적 일치, 즉 하느님의 자기 양여로서의 초월 체험을 신비 체험이라 규정한다.
1.3.1.2. 신비체험은 하느님의 자기 양여로서의 은총 체험이다
유한하고 시공간 안에 제한되어 있는 존재인 인간은 자기 힘으로는 절대 신비로 머무시는 하느님께 도달할 수 없다. 이 때문에 불완전한 초월적 실존이 이 신비에 다가갈 수 있도록 신비 자체가 인간에게 주어져야 한다. 라너는 인간 존재의 심연에는 그러한 가능성과 조건이 하느님의 자기 양여를 통해 선험적으로 이미 주어져 있으며, 선험적인 이 하느님의 자기 양여를 은총이라 규정한다 . 초월 신학 안에서 하느님의 자기 양여는 은총의 본질이 된다. 따라서 인간은 애당초부터 존재론적으로 은총에 의해 고양되어 있으며 ‘신화’(神化)되어 있는 초월적이고 초자연적인 존재인 것이다 . 이러한 은총을 통해 초월을 안으로부터 열고 지탱하는 절대 초월은 거룩한 신비로서 절대적으로 가까이 현존하시며 인간에게 자기 자신을 건네주신다 . 이렇게 인간은 초자연적 고양 속에서 하느님의 자기 양여를 통해 항상 그리고 어디서나 은총 체험을 하게 되어 있다 . 라너는 이러한 초월적 은총 체험을 “신비체험”과 동일시 한다.
1.3.1.3. 신비체험은 하느님의 자기 양여로서의 계시와 믿음 체험이다
초자연적 은총으로 주어지는 하느님의 자기 양여는 이중적인 양식을 지니고 있다: 하나는 인간의 자유에 앞서서 선험적으로 주어져 있는 초자연적인 상황으로서의 부르심이며, 다른 하나는 초자연적 실존으로서 이 부르심에 대한 인간의 응답이다 . 여기에서 선험적으로 주어지는 하느님의 자기 양여로서의 부르심은 초자연적인 계시의 양상으로 나타나고, 이에 대한 인간의 응답은 계시에 대한 동의와 수용인 믿음의 행위로 나타난다 . 즉, 초자연적 계시와 믿음은 초자연적 은총으로 주어지는 하느님의 자기 양여의 필연적인 이중적 양식인 것이다. 따라서 초자연적 계시와 믿음은 하느님의 자기 양여로서의 초월 체험이요 하느님의 초자연적 은총으로서의 초월 체험으로, 근본적으로는 하느님 사랑에 대한 신비체험과 다르지 않게 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라너는 신비 체험을, 인간의 실존에 대한 철저한 수락을 통해 하느님의 초자연적인 자기 계시를 수용하는 믿음 체험이라 규정한다 .
1.3.1.4. 신비체험은 성령의 체험이다
지금까지 신비체험으로 소개한 하느님의 자기 양여로서의 초자연적 은총 체험과 하느님의 자기 양여로서의 계시 및 은총 체험은 본질적으로 하느님의 자기 양여로서의 초월 체험과 동일하고, 이 초월 체험은 당연한 논리적 귀결로서 늘 하느님에 대한 체험일 수밖에 없는데 , 라너는 이 초월 체험을 성령 체험이라고 규정한다 . 그리고 라너는 성령 체험으로서의 신비 체험은, 비록 비주제적이고 숨겨져 있으며 불투명하고 비반성적인 형태이긴 하지만, 인간의 일상적 삶 안에 현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 성령의 초월적 체험은 구체적이고 일상적인 체험들을 통하여 인간의 의식을 관통하고 있으며, 일상적 실재는 성령의 초월적 체험의 반향 안에서 변화된다는 것이다 . 라너에 의하면, 이러한 성령의 초월적 체험이 범주적으로 성취되는 구체적인 사례들은 무한히 있을 수 있다 . 신비에로 열려진 인간은 사실 일상적이며 초자연적인 체험을 통해 하느님의 자유로운 은총과 성령을 체험하며, 이렇게 일상적인 삶 안에서 성취되는 초월적인 모든 체험은 성령의 자기 양여 안에서 이루어지는 구원 체험이 된다.
2.3. 라너 신비 신학의 새로운 지평: 신비 체험의 일상성, 익명성, 보편성
‘전통적인’ 그리스도교 신비신학은, 초자연적인 무상의 선물들은 드물게 주어진다는 암묵적인 동의 아래, 환시, 탈혼, 황홀경, 몸이 공중에 뜨는 현상, 무아적 명상, 미래에 대한 예견, 텔레파시적인 능력, 오상 등과 같은 현상들의 초자연적인 특성을 강조하면서, 비교적(秘敎的) 현상의 특별하고 엘리트적인 특성을 부각시켰다 . 이러한 신학적 환경 안에서 정상적인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신비 체험을 자신들과는 무관한 일로 여기게 되었다 . 그러나 라너는 드물게 일어나는 비교적 현상들을 신비 체험의 참된 본질과 구별시키면서, 신비체험은 일상적 크리스천 체험 저 너머에 절대적으로 있는 어떤 사건이 아니며, 모든 크리스천들과 모든 사람들이 할 수 있고 바랄 수 있는, 일상적인 삶 안에서 발생하는 믿음 체험이며 은총 체험임을 강조하였다 . 믿음은 하느님과의 신비적 일치 안에서 신비적 빛에 의해 극복되는 것이 아니며, 하느님과 인간의 신비적 일치나 무상으로 주어지는 성령의 체험의 관점에서 보는 한, 신비 체험이 은총의 삶보다 질적으로 더 ‘우월한’ 단계로 나타나는 것도 아니다 . 이 지상에서 성령 안에서의 믿음의 체험보다 더 우월한 체험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본연의 모든 신비체험은 믿음 안에서 이루어지는 은총 체험의 ‘아랫종류’로서만 이해될 수 있으며 , 은총과 믿음과 성령의 소유와 하느님의 거주에 관한 참된 그리스도교 신학은 믿음과 은총의 체험 사이에 본질적으로 구별되는 그 어떤 중간적인 상태도 인정하지 않는다 . 진정한 신비 신학은 모든 크리스천들이 일상적인 삶을 통해 보편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은총과 믿음의 정상적인 틀 안에서만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 이 때문에 라너는 자신이 정초한 신비 신학을 일상의 신비 신학이라 부른다 .
이러한 교의신학적 기초하에 라너는 은총에 의해 지탱되고 성령을 받아들이는 신비체험은, 크리스천 완덕의 여정에 있어 정상적인 한 단계로서, 인간에게 주어지는 하느님의 자기 양여 안에서 믿음과 희망과 사랑과 더불어 성취되는 것임을 강조한다 . 이는 초월에 대한 신비 체험의 참된 현상은 이미 믿음과 희망과 사랑을 통한 크리스천 삶의 단순한 사건들 안에서 발생하고 있고, ‘하느님’이란 이름 없이 신비를 지향하는 비반성적인 이러한 개방은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은총을 통해 이미 존재하며, 어디서든지 믿고 바라고 사랑하면서 은총 안에서 주어지는 하느님의 자기 양여를 자유롭게 수용할 때에 구체적인 삶 안에서 실천된 신비체험은 크리스천 체험의 전형성을 지니게 된다는 것이다 . 라너는 초월에 대한 신비 체험의 보편성을 규명하면서,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체험이 ‘일상 안에 현존하며 작용하는 성령’을 통하여 성취되며, 이러한 향주3덕은 신비 체험에 의해서 극복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된다는 것을 아울러 밝혀 놓았다 .
본질적으로 신비적인 인간(homo mysticus)은 일상적인 삶을 통해 초월의 신비체험을 하게 되고, 이 체험을 통해서 그리고 이 체험 안에서 자기를 성취하게 되는데, 이러한 자기 성취는, 비록 주제적으로 인식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항상 성령과 초자연적 은총과 하느님의 자기 양여에 의해 지탱되고 뿌리내려진다 . 따라서 성령과 초자연적 은총은, 모든 역사 안에서 모든 인간에게 초자연적 구원의 구체적인 가능성을 제공하는 하느님의 보편적 구원 의지에 따라, 인간의 초자연성의 근본적인 실현으로서 인간의 자유로운 자기 성취가 이루어지는 곳에서는, 제도적인 그리스도교회 밖이라 할지라도, 언제 어디서나 존재한다 . 라너는 신비에로 열려진 초월로서의 인간의 존재론적인 초월적 구조와 원초적인 초월 체험을 밝히고, 인간 존재 안에 거룩한 신비로서의 초월적 지평이 현존하며, 이러한 선험적이고 비제주적인 지평으로서의 초자연적 은총과 계시를 바탕으로 초월 체험이 범주적으로 중개됨을 규명하면서, 구원의 은총과 성령의 보편적인 현존을 논증하였다. 따라서 본래의 참된 은총 체험과 성령 체험으로 해석되는 신비체험은, 비록 비주제적이고 익명적이긴 하지만, 언제 어디서나 있을 수 있고 또 있어야 한다 .
신비 체험에 대한 전통적인 신학에서는 “정직한 행위”(actus honesti)와 같이 아직 초자연적인 구원의 행위는 아니나 존재론적으로 본질적인 영적 행위가 있을 수 있다고 여긴다 . 그러나 라너는 인간의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실존에서는 은총에 의해 초자연적으로 고양되지 않은 ‘정직한 행위’란 전혀 존재하지 않으며 , 초자연적이지 않은 ‘자연적’ 신비 체험 역시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 ‘정직한 행위’는 그 자체로 이미 성령에 의해 지탱된 초월 체험이며, 모든 초월 체험은 초자연적 은총 체험이기 때문에, 세례를 받지 않은 그리스도인들의 ‘정직한 행위’를 통해서도 초자연적 은총 체험으로서의 신비 체험은 명백히 가능하다 . 따라서 그리스도교 교의 신학은 제도적이고 명시적으로 고백되는 그리스도교 밖에서도 성령에 의해 지탱되는 인간의 초월성에 의해 성취되는 하느님의 자기 양여 체험으로서의 초자연적 신비체험이 발견될 수 있다는 신학적 사실을 원천적으로 부정하지 않는다 . 라너는 이를 ‘익명의 크리스천 신비체험’이라 부르며, 모든 신비 체험은 그 어느 곳에서든 예수 그리스도와 객관적인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에, 익명의 크리스천 신비 체험은 일종의 ‘찾고 있는’ 그리스도론이라 규정한다 . 라너는, 마태오 복음 25,35-36에 나타나는 이웃에 대한 사랑의 행위는, 설사 그리스도인 줄 전혀 몰랐다 하더라도, 곧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의 행위라는 바로 예수의 가르침을 근거로, 모든 신비 체험은 그리스도를 지향하고 있다고 단언한다 .
이상과 같이 라너는 일상적인 삶 안에 숨어 현존하는 성령에 대한 명시적 혹은 익명적인 신비 체험의 가능성과 당위성을 형이상학적 기초신학적으로 규명해내면서, 크리스천 신비 체험의 보편성을 교의신학적으로 확립해 놓았다. 라너는, 보편적인 신비 체험을 통하여, 명시적인 크리스천이든, 익명적인 크리스천이든, 누구나 지복직관 안에서 삼위일체 하느님의 신적 본성에 참여할 수 있기 때문에, 이러한 보편적인 신비신학을 이전의 ‘전통적인’ 신비신학과 대조시켜 ‘새로운 신비신학’이라 부른다 . 지난 한 세기 동안 펼쳐졌던 신비신학에 관한 논쟁은 일상의 신비 체험과 익명의 크리스천 신비 체험을 바탕으로 새로운 전망 안에서 체계화된 라너의 보편적 신비신학을 통해 그 절정에 달하게 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3. 보편적 관점에서 비추어 본 신비체험의 개념
라너의 신비 신학에 의하면, 인간은 존재론적으로 절대 신비에로 열려진 존재로서 신비체험을 회피할 수 없는 존재이다. 라너의 이러한 관점은, 창조된 이래 인간은 필연적으로 절대 신비이신 하느님과 관계를 맺어 왔으며 인간의 역사는 곧 신비체험의 역사임을 의미하는 것이라 하겠다. 사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신비로운 존재이기 때문에, 모든 시대 모든 곳에 신비가들이 있었고, 또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 그리고 많은 신비가들이 자신들의 체험에 대한 증언들을 글로 남겨놓거나 또는 이 체험들을 이론적으로 정리해놓았다. 그러나 신비체험은 그 본질상 체험 주체마다 고유하게 체험되는 주관적 차원을 지니고 있어, 신비체험의 규정은 신비가나 신학자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고 그 개념도 다의적인 양상을 띠지 않을 수 없다. 이로 말미암아 지난 세기에는 “신비체험”이라는 용어의 의미를 놓고 격렬한 논쟁이 야기되었다. 여러 신학자들에 의하면 이 용어는 아직도 모호한 상태로 남아 있으며, 발타살(H. U. von Balthasar)이나 포이어스타인(G. Feuerstein) 같은 신학자들은 이러한 모호성 때문에 신학 분야에서 더이상 “신비체험”(mistica)이라는 어휘를 사용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탄식까지 할 정도였다 . 그러나 지난 세기의 신비체험 논쟁을 통하여 다음과 같이 몇 가지 점에서 어느 정도의 일치를 보는 성과도 있었다: 즉, 모든 인간은 신비 체험에로 불리었다; 환시, 황홀, 무아경, 육체의 비상 등과 같은 특별한 현상들은 신비 체험의 본질과 관계가 없다; 신비체험의 길은 하나이다; 신비체험은 크리스천 영적 체험 가운데 중심에 자리한다, 등. 이 논문에서는 이러한 일치점들을 전제로 신비체험의 개념을 보다 명확하게 규명하고자 시도할 것이다 . 지금까지 신비체험에 관한 수많은 정의와 설명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한 번 그 개념을 규정하고자 하는 까닭은 먼저 신비체험의 본질적인 요소들을 규명한 다음 그에 따라 정의한 개념을 찾아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신비체험의 본질을 규명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신비체험의 대상이 무엇인지’, ‘신비체험의 목적은 무엇인지’, 그리고 ‘신비체험은 어떻게 가능한지’가 밝혀져야 할 것이다. 이 논문에서는 이러한 세 가지 요소들, 즉 신비체험의 대상과 방법과 목적을 준거로 신비체험의 본질을 살펴볼 것이다.
3.1. 신비체험의 대상: 신비
신비체험의 대상은 하느님, 성령, 사랑, 하느님의 현존, 궁극적인 하느님의 실재, 절대자, 비밀스런 지혜, 은총, 그리스도의 생명, 삼위일체 하느님의 생명 등 학자들에 따라 다양하게 표현되고 있다 . 그러나 하느님의 본질을 가장 잘 드러내주는 하느님의 이름은 신비이고, 이 신비는 종교와 인종을 초월하여 널리 통용될 수 있는 보편성을 지니기에, 이 논문에서는 신비를 신비체험의 가장 적합한 대상으로 선택하였다 .
“신비”(mistero)라는 용어는 그리스어 “뮈스태리온”(musth,rion)으로부터 유래되는데, 이 명사는 입이나 입술을 닫거나 눈을 감는다는 의미를 지닌 동사 “뮈에오”(mue,w)으로부터 왔을 것으로 추정된다 . 따라서 신비는 어원적으로 비밀을 지킬 필요가 있는 그 무엇과 관계가 있다 . 그리스 헬레니즘 문화 안에서 ‘뮈스태리온’은 이중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즉, 하나는 세속적인 것이고, 다른 하나는 종교적인 것이다. 세속적인 의미에서 이 단어는 진실이나 숨겨진 실재, 또는 어떤 비밀을 가리켰고, 종교적인 의미에서는, 특히 복수 형태로, 종교 예절을 시작하는 자들이 비밀을 절대적으로 지켜야 하는 배경 안에서 신비들이나 종교적인 시작 예식을 가리키는데 사용되었다 . 그리스도교 안에서 ‘뮈스태리온’이라는 용어는 두 가지 의미를 모두 지니고 나타난다. 즉, 하느님 진리의 신비와 거룩한 예식의 신비이다. 라틴 교회에서 이 그리스어 ‘뮈스태리온’은 일반적으로 “사크라멘툼”(sacramentum)으로 번역되었고, 이 라틴어는 무엇보다도 성사적인 예식에 적용되었다. 그러나 “미스테리움”(mysterium)이라는 용어 또한 이교도들의 비교적인 예식을 지칭하거나, 성서의 숨겨진 의미를 포함하여, 숨겨진 진리를 나타내기 위해서 사용되었다 . 아우구스티노는 ‘미스테리움’과 ‘사크라멘툼’을 거의 상호 교환적인 의미로 사용하였다 . 그리고 중세에 와서 이 두 용어들은 아우구스티노를 따라 대개 동의어로 사용되었다 . 시간이 더 흘러가면서 비로소 이 용어들은 다른 의미로 사용되었는데, ‘미스테리움’은 전적으로 그리스도교의 숨겨진 진리를 표현하는 용어가 되었고, ‘사크라멘툼’은 예식이나 거룩한 실재를 나타내는 용어가 되었다 .
오늘날 “신비”라는 용어는 그리스도교 신학의 중심 개념들 중의 하나로, 칼 라너에 의하면, 이는 하느님의 수많은 이름들 중에서 하느님의 본질을 가장 잘 보여주는, 하느님의 가장 적합한 이름이다 . 즉, 신비는 창조된 모든 사물을 무한히 초월하면서 형언할 수 없는 절대 존재로 머무시는 하느님의 신비적 본질을 제대로 규명해주는 용어이다. 이런 의미에서 하느님은 본질적으로 “데우스 미스티쿠스”(Deus mysticus, 신비의 하느님)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신비는, 다른 모든 초월적 속성들과 마찬가지로, 정의될 수 있는 개념이 아니다 . 어떤 개념이 정의된다는 것은 하나의 명제로 표현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신비가 정의되어 하나의 명제로 표현된다는 것은 신비가 다른 여러 범주적인 대상들 사이의 하나로 나란히 있게 된다는 것을 뜻하고, 타자인 하느님으로부터 유래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신비는 이해할 수 있는 단순한 어떤 타자가 아니다. 신비는 신비 체험을 하는 순간조차도 그 본질을 본래 파악할 수 없는 익명적이고 비주제적이며 무한히 거룩한 실재이다. 따라서 신비는 일시적으로 베일 속에 싸여 있다 나중에 확연히 인식하게 되는, 그 결과 더 이상 신비로 남아 있지 않게 되는, 수수께끼 같은 그런 실재가 아니다. 신비는 지복직관 안에서조차 인간 존재에게는 끝까지 다 파헤쳐지지 않는, 변함없이 불가해한 신비로 남는다 .
이러한 신비가 하느님의 유일한 실재이며, 이 유일한 원초적 신비와 분리되어 있는 다른 신비들이란 있을 수 없다. 창조된 모든 존재자는 신비 자체와 무한한 관계를 맺고 있으며, 절대 신비의 불가사의적 특성에 참여하게 된다. 유한한 존재자들은 이러한 관계 밖에서는 적절하게 이해될 수 없으며, 가장 하찮은 피조물에 대한 인식도 충만하게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하느님에 대한 인식과 동일한 과정을 통해서만 가능해진다 . 이런 의미에서 실재에 대한 모든 이해는 궁극적으로 늘 “하느님 신비에로 환원”(reductio in mysterium Dei) 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유한자의 범주적 세계에는 절대적 신비들이 복수로 있을 수 없고, 인간에게 있어 하느님으로서의 하느님은 실로 유일한 “신비”(mysterium)로만 존재한다 .
한편, 신비는 인격적 주체 밖에서 이 주체를 무한히 초월하면서(trascendente) 동시에, 익명적이고 비주제적이긴 하지만, 이 주체 안에도 현존한다 . 라너에 의하면, 인간은 신비가 관통하고 있는 존재, 즉 “호모 미스티쿠스”(homo mysticus), 신비인(神秘人)이며, 이 신비인은 ‘신비적이지 않은 실재’와 ‘이해할 수 있고 개념으로 정리할 수 있는 실재’에 몰두해 있을 때조차도 늘 신비와 관계를 맺고 있는 존재이다. 따라서 신비는 운이 좋으면 우연히 만나게 되는 그런 어떤 것이 아니며, “인간은 의식하지 않을 때조차도 언제 어디서나 신비를 살아간다” . 그리고 인간이 본질적으로 신비를 지향하고 있는 것처럼, 하느님 또한 거룩한 신비로서 “호모 미스티쿠스”인 인간 존재와 본질적으로 관계를 맺고 있다. 이렇게 신비는 한편으로는 인간 존재와 대단히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 존재의 심연에 항상 존재하면서 인간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그리고 신비는 정의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으나 하느님의 유일한 실재로서 가장 명백한 실재이다. 불가해하면서도 명백한 이 신비야말로 무한한 바다로서 유일하고 영원한 평화이며, 바로 이 안에 인간 존재의 영원한 지복이 있다 . 이런 의미에서 신비는 인간 존재가 지향하는 유일하고 참된 대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지금까지 간략하게 고찰한 신비 개념을 종합하면, 신비는 하느님의 본질이자 인간의 본질이며, “호모 미스티쿠스”(homo mysticus)인 인간은 본질적으로 “데우스 미스티쿠스”(Deus mysticus)를 지향하도록 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하느님과 인간의 본질인 이 신비가 신비체험의 대상으로서 가장 적절하다고 여겨진다.
3.2. 신비체험의 방법: 관상
신비체험의 개념을 규정하면서 신비체험의 방법을 그 정의에 반영시키는 학자들은 많지 않으며, 이들 가운데 관상을 신비체험의 방법으로 제시하는 학자들은 더욱 드물다 . 이러한 현상은 역사적으로 ‘관상’과 ‘신비체험’을 동일한 개념으로 이해해 왔던 그리스도교의 오랜 전통과 무관하지 않겠으나, ‘관상’과 ‘신비체험’은 낱말 자체가 다르기 때문에 고유하게 그 개념을 정의할 필요가 있으며, 이 논문에서는 관상을 신비체험의 방법으로 규정하고자 한다.
라틴어 “콘템플라리”(contemplari)는 “쿰”(cum)과 “템플룸”(templum)으로 이루어진 동사로 놀람과 감탄으로 골똘히 바라보는 것을 의미하며, 이 동사로부터 “콘템플라씨오”(contemplatio)라는 명사가 파생되었다다. 이 동사의 첫 번째 구성 요소인 “쿰”(cum)은 동시성, 공동성, 일치를 의미하는 전치사이고, 두 번째 요소 “템플룸”(templum)은 창공, 눈에 보이는 하늘로 둘러싸인 공간, 또는 신성한 대상에게 바쳐진 신전을 뜻하는 명사이다 . 이러한 두 낱말로 구성된 “콘템플라리”(contemplari) 동사는 하늘 공간이나 신전에 거주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었으나, 점차 장소보다는 실재의 내부를 바라본다는 뜻을 갖게 된다 . “관상”(contemplatio)과 “관상하다”(contemplari)는 말들은 그리스도교 안으로 들어오면서 하느님에 대한 바라봄을 가리키게 되고, 나중에는 신비 체험을 뜻하는 전문적인 용어가 된다. 라틴말 “콘템플라씨오”(contemplatio)에 해당되는 그리스말은 “테오레오”(qewre,w) 동사에서 파생된 “테오리아”(θεωρία)로, 이는 뭔가를 주의 깊게 어떤 목적을 갖고 응시하고, 관찰하고, 바라보는 것을 뜻한다. ‘테오리아’는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를 통해 처음으로 그리스도교 용어들 안으로 들어오게 되는데 , 그에 의하면, ‘테오리아’의 궁극적 대상은 최고의 “그노시스”(γνώσις), 즉 “하느님을 인식하는 것”이고 “하느님을 보는 것”이다 . ‘테오리아’ 명사는 신약성서에 나타나지 않지만 이 용어 대신에 이와 비슷한 의미를 지닌 “블레포”(ble,pw, 116 번), “테오레오”(qewre,w, 58 번), “호라오”(ra,w, 114 번), “에이도”(ei;dw, 623 번), “테아오마이”(qea,omai, 22 번) 같은 동사들이 나타난다 . 따라서 이러한 낱말들을 통해서 하느님을 보고 그분의 신비를 바라본다는 의미의 관상 개념을 파악할 수 있다.
바라봄에는 육체적인 바라봄과 영적인 바라봄 그리고 지복직관 세 가지 유형이 있다. ‘믿는이들’은 내적인 과정을 통해, 즉 단순한 육체적 바라봄으로부터 출발하여 신적 실재에 대한 영적인 바라봄에로 나아간다. 신비체험의 방법으로서의 관상은 바로 이러한 영적 바라봄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러나 관상은 바라봄이라는 시각하고만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니다. 관상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신비를 포착하는 모든 영적 감각들과 관계가 있다. 다시 말하면, 영적 감각들은 하느님의 신비를 그 대상으로 삼으며, 인간 주체는 이 영적 감각들을 통하여 하느님의 신비를 인식하게 되는데, 이 인식이 바로 관상이다. 이런 의미에서 관상이란 영적 감각들을 통하여 하느님의 신비를 인식하는 것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인간 존재는 하느님 신비를 관상하도록 선험적이며 존재론적으로 지향되어 있다. 그리고 인간에게 있어 완전한 관상은 곧 지복직관을 의미하며, 이 지복직관 안에서 인간은 삼위일체 하느님의 신적 본질에 참여한다. 이 참여는 절대적 친밀 안에서 신비의 동반자인 인간 존재에게 주어지는 관상의 자연스런 결과이다. 이와 같이 신비를 지향하는 신비로서의 인간과 하느님 본성에의 참여로서의 지복직관 사이에는 어떤 필연적인 관계가 있다. 라너는 이러한 지평에서 인간을 지복직관을 지향하는 존재이며, 이 직관 안에서 인간은 자신의 실재에 가장 철저하게 다다르게 된다고 말한다 .
한편, 신비체험의 방법으로서의 관상은 삼위일체 하느님의 관상에 그 원천과 목표가 있다. 여기에서 삼위일체 하느님의 관상이란, 삼위 일체의 세 위격들이 절대적이고, 완전하고, 영원하며, 무한하고, 형언할 수 없는 상호간의 신비를 서로 관상하는 것을 뜻하는데 , 이 신비의 본질은 완전하고 절대적인 사랑이다. 이 사랑 안에서 그리고 이 사랑을 통해서 성자는 ‘성자를 완전하게 사랑하는 사랑 자체이신 성부’를 관상하고, 성부 역시도 똑같은 방법으로 ‘사랑 자체이신 성자’를 관상한다. 그리고 이러한 성부와 성자 사이의 사랑이 ‘사랑 자체요 신비 자체로서의 성령’이시다 . 그런데 아드리엥 폰 스파이어(A. von Speyr)에 의하면, 영원한 관상의 심연에서 세 위격들 상호간의 사랑을 관상하는 삼위일체 하느님은 관상의 주체이면서 동시에 대상이며 , 한스 우르스 폰 발타사르(H. U. von Balthasar)에 의하면, “우리는 ... 하느님의 삼위일체 생명을 그 자체로 관상할 수 없고”, “동일한 양식으로 우리는 삼위일체를 그 자체로 우리 사상의 대상으로 삼을 수”도 없다 . 발타사르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하느님만이 홀로 절대적이고 완전하게 삼위일체의 신비를 관상할 수 있으며, 인간 존재는 이 관상을 관상하면서 그저 참여할 따름이다 . 이러한 관점에서 삼위일체 하느님은 세 위격의 완전한 사랑의 신비를 영원히 서로 관상하는 “데우스 콘템플라티부스”(Deus contemplativus), “관상의 하느님”이라 말할 수 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익명적이든 명시적이든, 삼위일체 하느님의 영원한 관상에로 불리었으며, 초자연적 은총, 즉 성령을 통하여 이 관상에 참여한다 . 즉, 인간은 하느님의 신비를 관상하지 않을 수 없는 존재이며, 이런 의미에서 인간 존재는 본질적으로 “데우스 콘템플라티부스”(Deus contemplativus), 즉 “관상의 하느님”과 관계를 맺고 있는 “호모 콘템플라티부스”(homo contemplativus), “관상인”(觀想人)이라고 말할 수 있다 . 모든 인간은 삼위일체 하느님의 관상에 참여함으로써 완성되는 관상, 즉 지복직관에로 예외없이 불리어진 관상하는 존재이다. 따라서 “호모 미스티쿠스”는 동시에 지복직관과 삼위일체 하느님의 관상을 지향하는 “호모 콘템플라티부스”이고, 모든 인간은 “관상하는 인간”으로서 이러한 직관과 관상에로 불리어졌다는 말이다. 이렇게 “호모 미스티쿠스”는 선험적이고 존재론적으로 주어진 육체의 감각들과 영적인 감각들로 구성된 관상의 능력을 통해 하느님의 신비를 관상한다. 그리고 “호모 콘템플라티부스”는 하느님의 이 신비와 일치되지 않을 수 없다. 하느님의 신비와 신비적으로 일치하도록 이끄는 이러한 관상이 바로 신비체험의 방법이다 .
3.3. 신비체험의 목적: 사랑의 일치
많은 학자들이 신비체험을 설명하면서 하느님과의 사랑이나 하느님과의 일치 혹은 사랑의 일치에 대해 비교적 자주 언급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의 일치를 신비체험의 목적으로 분명하게 밝힌 신비체험의 정의들은 의외로 많지 않다 . 그러나 사랑의 일치는 신비에 대한 관상으로부터 필연적으로 유래되는 결과이다. 따라서 사랑의 일치는 신비체험의 목적으로서 그 정의에도 포함되어야 할 것이다.
모든 인간은 본질적으로 일치를 동경하는 존재이고, 그러한 일치에 대한 동경은 초월의 지평을 통해 이미 인간 존재 안에 존재론적으로 주어져 있다 . 이렇게 은총 안에서 일치가 선험적이며 존재론적으로 인간 존재에게 주어져 있어, 인간은 본질적으로 “호모 우니투스”(homo unitus), ‘일치되는 인간’이라 말할 수 있다 . 즉, 인간은 하느님, 즉 모든 다양한 실재들을 하나로 일치시켜 주는 , 절대적 충만으로서의 일체이신 “데우스 우니엔스”(Deus uniens), ‘일치시키는 하느님’을 지향하는 “일치인”(一致人, homo unitus)인 것이다. 이러한 존재론적이고 비주제적인 인간의 일치성은 지복직관에서 충만하게 완성되고, 이 지복직관 안에서 인간은 삼위이시고 일체이신 “데우스 우니엔스”(Deus uniens)와 온전하게 일치된다.
“호모 우니투스”(homo unitus)인 인간과 “데우스 우니엔스”(Deus uniens)인 하느님과의 신비적 일치는, 육화하시고 십자가에 돌아가신 그리스도의 신비를 통하여 실현되며,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는 하느님과의 신비적 일치의 원리이고 길이 된다 . 실제로 인간은, 그리스도의 위격적 일치를 통하여, 삼위일체 하느님과 인격적으로 일치된다. 이와 같은 신학적 지평에서 요한 복음 저자는 하느님과 인간의 신비적 일치에 대해 자주 언급하는데, 예를 들면, 요한 6,54-56과 14,20.23과 15,2.4-7.9-10 등이 그렇다. 특히 요한 17,20-26에는 다른 그 어느 곳보다 신비적 일치의 의미가 잘 묘사되어 있다: “저는 그들에게 아버지의 이름을 알려 주었고 앞으로도 알려 주겠습니다.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신 그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저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요한 17,26). 예수님께서 바치신 “사제의 기도”의 마지막 구절인 이 문장의 핵심 주제는, 십자가에서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성부와 그리스도와 제자들 사이에 사랑의 일치가 실현되는 것이다.
그런데 신비적 일치는 항상 인간 실존의 기초요 모든 실재의 유일한 원천인 사랑의 신비 안에서 실현된다 . 사랑은, 모든 실재를 일치시키는 본질로서, 다양성의 복된 일치를 지향하는 인간 실존을 통합하는 절대적 힘을 본성적으로 지니고 있다 . 그러므로 모든 신비적 일치는 사랑의 원리에 따라 실현되고, 따라서 신비적 일치는 근본적으로 사랑의 특성을 지니고 있다 하겠다.
사랑의 신비 안에서 이루어지는 삼위일체 하느님과 인간의 결정적인 일치는 신비 자체에 대한 바라봄, 즉 지복직관 안에서 전적으로 실현된다. 그런데 이는 지복직관의 씨앗이요 시작으로서의 창조되지 않은 은총의 소유에 비례하여 이 지상에서부터 시작된다 . 칼 라너의 초월 신학에 따르면, 하느님은 형상인을 통하여 은총 안에서 인간에게 자신의 본질을 스스로 양여하시는데, 이러한 양여는 단순하게 창조된 은총으로부터 비롯되는 결과가 아니며, 창조된 은총을 논리적이고 객관적으로 앞서는 창조되지 않은 은총의 양여이다 . 이렇게 창조된 영으로서의 인간 존재의 심연에는, 비주제적이고 익명적으로 존재하는 창조되지 않은 은총을 뜻하는 초월의 지평이 존재론적으로 주어져 있다. 지복직관의 존재론적 전제조건으로서의 창조되지 않은 은총은 절대 존재가 창조된 영에게 양여되는 하느님의 자기 양여의 시작이며, 이는 창조된 영과 하느님의 충만한 일치 , 즉 지복직관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느님에 대한 온전한 소유를 향하여 끊임없이 성장해간다. 창조되지 않은 은총의 이러한 양여는 지복직관의 전제조건으로서 진행 과정 중에 있는 존재론적 일치를 의미한다 . 결론적으로 “호모 우니투스”(homo unitus, 일치되는 인간)는 지복직관, 즉 하느님의 신비에 대한 온전한 관상 안에서의 완전한 사랑의 일치를 지향하면서, 이 세상에서부터 “데우스 우니엔스”(Deus uniens, 일치시키는 하느님)와 사랑 안에서의 일치의 여정 중에 있는 것이다.
하느님의 신비에 대한 관상을 통하여 “호모 콘템플라티부스”(homo contemplativus), 관상인은 사랑 자체이신 “데우스 우니엔스”(Deus uniens), 일치시키는 하느님과 필연적으로 그리고 당연히 일치되는 존재이며, 그러기에 관상하는 인간은 동시에 신비 자체와의 일치에로 지향된 “일치되는 인간”(homo unitus)이 된다. 즉, 인간 존재는 “신비인”(homo mysticus)이요 “관상인”(homo contemplativus)으로서, “신비의 하느님”(Deus mysticus)이시고 “관상의 하느님”(Deus contemplativus)이시며 “일치시키는 하느님”(Deus uniens)이신 삼위일체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는, “일치되는 인간”, “호모 우니투스”(homo unitus)인 것이다. 그리고 “일치되는 인간”(homo unitus)과 “일치시키는 하느님”(Deus uniens) 사이에 이루어지는 신비적 일치는 사랑의 신비 안에서 실현된다. 왜냐하면, 신비의 본질은 사랑에 있는데, 이 사랑은 모든 범주적 피조물을 일치시키는 존재론적 힘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체이신 하느님을 지향하는 “신비인”(homo mysticus)은 관상을 통하여 사랑의 신비 안에서 삼위이신 하느님과 하나가 된다. 삼위일체의 신비와 이루어지는 이 사랑의 일치가 바로 신비체험의 궁극적이고 최종적인 목적이다.

지금까지 “신비체험”(la mistica)의 본질적인 세 요소, 즉 대상으로서의 신비, 방법으로서의 관상, 목적으로서의 사랑의 일치에 대해 간략히 살펴보았다. 이를 바탕으로 신비체험을 정의하면 ‘하느님의 신비를 관상함으로써 이 신비와 이루는 사랑의 일치’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우리가 규정한 신비체험은 믿음 안에서의 성령에 대한 초월적 체험을 의미하며, 이는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자기 양여 안에서 이루어지는 믿음, 바람, 사랑의 체험이라고도 표현할 수 있다 . 이런 관점에서 바라보면, 신비체험은 본질적으로 영적 체험과도 크게 다르지 않게 된다. 물론 영적 체험은 신비체험보다 더 넓은 개념으로, 이는 내적이고, 비가시적이며,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체험과 관계가 있으며, 여기에는 신비 체험만이 아니라, 수덕적 신심이나 영적 치유, 영적 교감, 1코린 12,4-11에 묘사된 여러 카리스마에 대한 체험 등 다양한 체험들이 포함된다. 그러나 신비체험은 구원에 필수불가결한 체험과 관계가 있으며, 크리스천 영적 체험의 핵심과 관계가 있다. 이러한 지평에서 모든 신비체험은 진정한 종교 체험의 중심에 자리하고 있고 , 모든 진정한 크리스천 체험은 본질적으로 신비체험이 된다고 하겠다 .
4. 결론
4.1. 내용 요약
이 논문에서 밝히고자 했던 주요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지난 20세기에는 신비체험에 관한 불꽃튀는 논쟁이 있었으며, 이 논쟁을 통하여 크리스천은 물론이고 모든 사람들이 신비체험에로 불리었다는 신비체험의 보편성이 신학적으로 정립되었다. 그리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회 헌장」을 통하여 신비 체험의 보편성을 간접적으로 확인해주었다.
(2) 칼 라너는 보편적 성소의 관점에서 신비 신학을 정립하는데 탁월한 기여를 한 신학자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그는 형이상학적, 인간학적, 기초신학적, 교의신학적 관점에서 신비체험의 보편성을 밝혀 놓았다.
(3) 라너의 신비 신학은 그가 심혈을 기울여 규명한 초월 사상 위에 정초되어 있다. 초월 사상의 주요 주제는 존재론적 물음으로서의 인간, 존재와 인식의 동일성, 인간 존재 안에 선험적으로 주어진 초월적 지평, 이 지평을 근거로 초월에로 열려져 있는 ‘영’(spiritus)인 인간, 이 영을 통하여 절대 초월을 지향하지 않을 수 없는 인간의 초월성, 초월을 지향하며 본질적으로 초월 체험을 하도록 구조화된 인간의 존재론적 처지, 초월 체험을 통하여 늘 하느님의 계시를 듣는 인간 등이다. 라너는 이러한 초월 사상을 바탕으로 절대 초월이 곧 하느님이자 신비라는 사실을 논증하면서, 인간 존재는 본질적으로 절대 신비를 지향하는 존재로서, 익명적이든 명시적이든, 신비체험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존재이며, 이 신비체험을 통해 지복직관에 참여함으로써 삼위일체 하느님의 신적 본질에 참여한다는 사실을 밝혀 놓았다.
(4) 라너가 주장하는 신비체험은 근본적으로 초월 체험과 다르지 않으며, 신비체험이란 하느님의 자기 양여로서의 초월 체험, 초자연적 은총 체험, 초자연적 계시와 믿음 체험, 하느님의 자기 양여로서의 성령 체험 등으로 이해된다.
(5) 이렇게 해석된 신비체험은 일상적인 삶 안에서 믿음과 바람과 사랑의 체험을 통하여 성취된다. 따라서 라너의 신비 체험은 ‘일상의 신비체험’이라는 특성을 지닌다. 라너가 규명한 신비체험은 또한 명백히 고백되는 제도적인 그리스도교 밖에서도 성령에 의해 익명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 따라서 ‘익명의 신비체험’이 가능하다. 라너는 일상의 신비체험과 익명의 신비체험을 바탕으로 모든 인간이 초자연적으로 고양된 ‘정직한 행위’를 통해 언제 어디서나 신비체험을 할 수 있다는 보편성을 교의신학적으로 정립해 놓았다.
(6) 지난 한 세기 동안 신비체험에 대한 논쟁이 전개되면서 신비체험의 보편성은 밝혀졌으나, 신비체험에 대한 정의는 아직도 모호한 상태로 남아 있다. 따라서 신비체험의 본질적인 요소들이 무엇인지 규명되는 가운데 신비체험의 개념이 명확하게 규정될 필요성이 있다.
(7) 이 논문에서는 신비체험의 본질적인 요소들을 규명하기 위하여 신비체험의 대상, 신비체험의 방법, 신비체험의 목적을 그 준거로 삼아, 대상으로서의 ‘신비’와 방법으로서의 ‘관상’ 그리고 목적으로서의 ‘사랑의 일치’를 신비체험의 본질적인 세 가지 요소들로 규정하였다.
(8) 신비는 하느님의 본질이자 인간의 본질이다. 따라서 하느님은 본질적으로 ‘신비의 하느님’, 즉 “데우스 미스티쿠스”(Deus mysticus)이고, 인간은 본질적으로 ‘신비의 하느님’을 지향하는 신비로운 인간, 즉 “호모 미스티쿠스”(homo mysticus)이다.
(9) 관상은 신비의 하느님과 신비로운 인간 사이의 관계를 맺어주는 구체적인 방법이다. 먼저 하느님은 삼위일체로서 세 위격 간의 절대적 사랑을 영원히 관상하는 관상의 하느님, 즉 “데우스 콘템플라티부스”(Deus contemplativus)이고, 인간은 이 삼위일체 하느님의 절대적 관상에 참여함으로써 자신의 실존을 완성시키는 관상적 존재, 즉 “호모 콘템플라티부스”(homo contemplativus)이다. 크리스천 신앙의 목표로서 고전처럼 언급되어 온 ‘지복직관’은 “비시오 베아티피카”(visio beatifica, 복된 바라봄)를 우리말로 번역한 것으로, 이 바라봄은 관상을 의미한다.
(10) 사랑의 일치는 신비에 대한 관상으로부터 필연적으로 빚어지는 결과이다. 신학적으로 하나일 수밖에 없는 신비는 일치시키는 힘을 본성적으로 지니고 있기에, 삼위일체 하느님은 ‘일치의 하느님’, 즉 “데우스 우니엔스”(Deus uniens)이고, 관상을 통하여 이 일치의 신비를 지향하는 인간은 ‘일치되는 인간’, 즉 “호모 우니투스”(homo unitus)이다.
(11) 하느님은 본질적으로 ‘신비의 하느님’, ‘관상의 하느님’, ‘일치의 하느님’이시고, 인간은 본질적으로 ‘신비의 인간’, ‘관상의 인간’, ‘일치의 인간’이다. 신비체험은 이러한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존재론적이고 보편적인 관계성이다.
(12) 신비체험의 본질적인 세 가지 요소를 바탕으로 신비체험을 정의하면, ‘하느님의 신비를 관상함으로써 이 신비와 이루는 사랑의 일치’라고 표현할 수 있다.
4.2. 전망
그리스도교 역사 안에서 20세기는 놀라운 발전과 커다란 혼란이 혼재된 가운데 결정적인 변화가 이루어진 중요한 전환기로 기록될 것이다. 구체적인 하나의 예를 보면, 이탈리아의 경우 1870년 문자 해독률은 2.5퍼센트에 지나지 않았으나, 1950년에는 18퍼센트, 1968년에는 50퍼센트, 1985년에는 75퍼센트, 2003년에는 97.7퍼센트에 이르게 된다. 1세기만에 모두가 지성인인 시대가 된 것이다. 지난 세기에 일어났던 혁명적 변화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이 단순한 통계는 한편으로는 20세기 후반기에 들어서기까지 정교하게 다듬어진 그리스도교 영성이 극소수만을 위한 엘리트 영성에 불과했으며, 대다수 민중들은 문맹자들로서 전근대적이고 신화적인 신앙 생활로 만족했었음을 추측하게 해주는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모두가 지성인인 이 시대에 대다수 신자들이 중세적인 대중 신심으로는 결코 만족할 수 없으며, 높은 수준의 지성적이고 영적인 신앙 생활을 갈망할 것임을 직관하게 해주는, 시대적 징표라 여겨진다. 아마도 신자들의 지성적이고 영적인 요청은 앞으로 시간이 흘러갈수록 점점 더 거세질 것이다. 이런 시대 흐름에 교회가 응답할 수 있고 마땅히 응답해야 하는 방향 중 하나는 신비체험의 보편화 아닐까 싶다. 왜냐하면,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욕망은 신비체험을 통해서 비로소 해결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적지 않은 신학자들이 신비 신학을 앞으로의 신학이 지향해야 할 하나의 방향으로 제시하고 있다.
신비체험의 보편성과 관련하여 성찰해야 할 또다른 관점은 이 시대가 겪고 있는 포스트모던적 상황이다. 지난 세기는 중세 형이상학과 신학 및 과학이 지향했던 절대주의와 보편주의가 무너지고, 근대 이후의 이성적 주체가 지향했던 합리주의, 객관주의, 과학주의의 무소불위한 가공성(可恐性)과 허구가 극명하게 드러나면서, 근대와 현대가 빚어놓은 닫혀지고 경직된 가치와 체계, 그리고 그 필연적 결과인 기계적이고 차가운 조직과, 인간성 및 생명을 질식시켜버리는 비윤리적 구조가 커다란 과제로 등장하는 가운데, 그동안 매몰되어 있거나 은폐되어 있던 상대성과 다원성이 강렬하게 부각되고, 인식과 가치 판단에 있어 새로운 패러다임의 전환이 모색된 시기였다. 그러나 21세기가 시작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패러다임은 아직도 구축되지 못한 상태이고, 여전히 개체를 전체로부터 소외시키면서 타자를 자기 체계 속에 편입시키는 전체주의의 횡포가 도사리고 있으며, 과학 기술의 놀라운 진보와 물질적 부의 축적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진정한 행복을 찾아 갈팡질팡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 위에 뿌리 내린 현대 서구의 패권주의적 폭력성, 가난을 확대 재생산하는 시장 논리의 냉혹한 지배, 기계와 조직에의 예속, 생태계 파괴 및 핵의 위협, 전 세계적인 고용 불안, 금융위기, 극심한 양극화 현상, 사회 구조적인 불평등의 문제 등으로, 21세기인들은 전근대적인 사회 이상으로 자유가 박탈된 상태에서 속박된 노예처럼 살아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현대인들에게 근원적으로 요청되는 것은 신비체험 아닐까 싶다. 우선적으로 인간은 신비체험 안에서 참으로 자유로울 수 있고 가장 자유로울 수 있으며, 포스트모던적 상황에서 현대인들이 대면하고 있는 많은 문제들 또한 신비체험 안에서 그 해결의 실마리를 새로운 차원에서 찾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신비체험은 종교 다원주의 상황에서도 요청되는 것으로 판단된다. 특히 한국과 같은 다양한 종교 문화 안에서는 더더욱 그러하다. 칼 라너를 위시하여 많은 신학자들이 종교 다원주의를 앞으로 발전시켜야 할 중요한 신학 과제들 가운데 하나로 예견하고 있는바, 이러한 전망에서 종교 다원주의는 신비체험 중심으로 새롭게 정립될 필요성이 있다고 보여진다. 지난 세기에는 종교 다원주의 신학이 전개되면서 ‘그리스도교 중심적이고 배타적 그리스도 중심적 신학 패러다임’으로부터 ‘신(神)중심적 패러다임’에로의 전환이 제기되었다. 그런데 이제는 이 ‘신 중심적 패러다임’이 신비체험을 기저로 ‘신비 중심 패러다임’으로 다시 한 번 전환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일차적 이유는 신비체험이 그리스도교 안에서만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종교 및 사상에서도 일반적으로 발견되며, 따라서 신비체험은 그리스도교를 포함하여 건강한 모든 종교들의 보편 현상이라는 데에 있다. 뿐만 아니라, 신비체험은 종교 체험의 최고 절정이기에, 여기에서 각 개별 종교의 고유성은 평가 절하 혹은 무시 되지 않으며, 오히려 그 고유성들이 신비체험의 정점에 다다르는 다양한 길들로 받아들여짐으로써 더 잘 보존되고, 또한 각 종교들의 경계가 초월되는 가운데, 각 종교들의 고유성들이 충돌없이 아름답게 잘 조화될 것이기 때문이다. 종교 다원주의가 신비 중심으로 전개될 때 대단히 심오하게 발전될 것이고, 그렇게 보편적인 신학으로 정립될 것이다.
새로운 천년기에 들어서서 신비체험이 성령의 인도 아래 이 시대의 구원의 물결로 흘러오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물결의 흐름은 교회 안팎에서 다양하게 감지되고 있다. 교회가 이 흐름에 민감하고 충실히 응답했으면 하는 마음이다.

 
 
이전글
 폴 틸리히의 신비주의 이론에 관한 소고
다음글
 
  

     
최대 2000byte(한글 1000자, 영문 2000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