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ngJo BBS


작성자
정재상
날짜
14/12/27 1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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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43
제 목
 폴 틸리히의 기도 신학에 관한 소고
첨부파일
 f127-14-12-27.hwp (52 K)
 
 

※ 본 논문은 2014년 필자의 박사학위논문 중 일부를 수정, 보완한 것임을 밝힙니다.

폴 틸리히의 기도 신학에 관한 소고

백상훈 (한일장신대학교 교수 / 실천신학 / 기독교 영성)

초록

이 논문은 폴 틸리히의 기도에 대한 이해를 살펴봄으로써 개신교적 기도 신학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데에 그 목적이 있다. 틸리히에게 기도는 존재의 근원으로 돌아가려는 영적인 갈망이요 궁극적 관심을 향한 마음의 고양이다. 이는 탈아적이고 계시적인 사건으로써 주체-객체 관계를 넘어서는 존재의 근원과 심연에의 참여이다.
이 연구의 목적을 위하여 먼저 틸리히의 기도 신학의 배경으로써 그의 종교철학적 유형론을 간략하게 검토한다. 그에게 신비주의와 관상은 가톨릭교회에 잘 보존된 성사적-수직적 요소인데, 개신교는 이를 기초로 삼아야만 자신의 독특성을 창조적으로 발현해 나갈 수 있다. 이어서, 틸리히의 저술 속에 나타난 기도에 대한 대표적인 정의들에 대한 심도 있는 분석을 시도한 후 이 분석을 기초로 틸리히의 기도 신학의 영성학적 함의를 결론부에서 약술한다. 틸리히의 기도 신학은 기도와 일상적 삶을 매개하고, 개신교적 영성 신학의 구성을 위한 단초를 제공하며, 기독교 영성 전통 속에서 발전되어 온 다양한 형태의 기도의 방법적 원리로써 활용될 수 있다.

주제어
영성, 기도, 탈아, 신비주의, 관상, 마음, 머튼

I. 기도, 신학, 그리고 일상적 삶

영적 실천 (spiritual practice)을 다루는 짧은 글에서 필립 쉘드레이크 (Philip Sheldrake)는 영성에 대한 현대적 논의에서 발견되는 두 가지 치우친 경향을 지적한다. 하나는 영적인 경험의 중요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나머지 실천, 훈련, 혹은 삶의 방식(lifestyle)과 같은 기독교 영성의 고전적 관념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종교적 신념이나 교리와 동떨어진 영적인 실천의 체계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 두 가지 경향의 조합으로부터 나오는 결과는 ‘무관심한 내면성’ (detached interiority) 이다. 내면적인 경험이 영적인 실천과 동떨어지고 영적인 실천은 일상세계에의 참여로부터 분리된다. 쉘드레이크에 따르면, 이러한 무관심한 내면성은, 내면성을 훈련하면서 윤리를 무시하는 행태를 지적했던 존 루이스브로익 (John Ruysbroeck)과 같은 서구 기독교 신비주의자들과 이냐시오식 영신수련을 비롯한 이른바 ‘일상생활의 실천 영성’(spiritualities of the practice of everyday life)에 의해 비판받을 수밖에 없다. 유해룡이 갈파한 대로 하나님 임재에 대한 자각은 우리의 삶 속에서 창조적이고도 풍성한 삶을 살게 하는 힘이 되어야 한다.
영적 실천의 하나인 기도는 하나님, 세계, 그리고 인간의 삶에 대한 기독교적 비전과 이해로부터 분리될 수 없으며, 일상세계로부터 분리될 수도 없다. 요컨대, 기도, 신학, 그리고 일상적 삶에의 참여, 이 세 가지는 기독교 영성에서 함께 논의되어야 한다. 달리 말하면, 기도라는 영적 실천을 감행하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건강한 기도의 신학이고, 건강한 기도의 신학은 기도자로 하여금 일상적 삶에 분별력을 가지고 참여하도록 독려한다.
본 연구는 건강한 기도 신학의 한 모형으로써 개신교 신학자 폴 틸리히(1886-1965)의 이론을 고찰하고자 한다. 틸리히는 기도에 관한 체계적이고 종합적인 저술을 시도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신학과 설교 속에는 기도에 관한 개신교 신학적 언술이 분명하고도 풍성하게 드러나 있다. 그에게 기도는 계시적 사건으로써 주체-객체의 이원론적 구조를 초월하는데,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그에게 기도는 곧 관상 (contemplation)이다. 따라서 기도는 두 존재 사이의 대화를 넘어 존재의 신비의 현존에 대한 인식으로 나아간다. 이 인식 속에서 하나님은 존재의 근원이요 심연으로 경험되며, 하나님 경험은 신비적 연합과 인격적 사귐을 포함하면서 동시에 넘어서는 “절대적 믿음” (absolute faith)의 상태를 유발한다. 절대적 믿음은 온갖 비존재(nonbeing)의 위협 속에서도 존재를 긍정하는 삶의 태도를 견인한다.
틸리히의 기도 신학의 면모를 살펴보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순서를 따르고자 한다. 먼저, 틸리히의 기도 신학의 배경으로써 그의 종교철학적 유형론을 간략하게 검토한 후, 기도에 대한 두 개의 정의적(definitional) 표현들에 대한 심도 있는 분석을 시도한다. 그리고 마지막 장에서는 틸리히의 기도 신학의 영성학적 함의를 약술한다.

II. 개신교의 기초로서의 기도와 신비주의

폴 틸리히의 기도 신학을 일별하기에 앞서 그가 자신의 종교철학적 유형론을 통해 제시한 바 있는 기도의 맥락(context)을 살피는 일이 필요하다. 이를 통해 우리는 틸리히가 기도를 종교 생활의 중심적 행위로 이해하고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이 장에서는 그의 두 소논문, 즉“개신교에 있어서 가톨릭교회의 항구적 중요성”(The Permanent Significance of the Catholic Church for Protestantism) (1941)과“수직적 사유와 수평적 사유”(Vertical and Horizontal Thinking) (1945)를 연구 자료로 삼고자 한다.
“개신교에 있어서 가톨릭교회의 항구적 중요성”에서 틸리히는, 인간은 이중적인 방식으로 성스러움(the holy)을 경험한다고 말한다. 하나는 ‘존재의 성스러움’(holiness of being)이고 다른 하나는 ‘요청의 성스러움’(holiness of what ought to be)이다. 전자는 인간이 신의 현현에 빠져 들어가 신과 연합하는 경험이요 후자는 신의 현현이 자아내는 두려움과 공포를 이겨내기 위하여 신적인 것에 부합하는 윤리적인 삶을 당위적으로 요청받는 경험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두 요소는 모든 종교에 내재하는 것이지만 어느 쪽이 우위에 있느냐에 따라 종교의 유형이 결정된다. 존재에 우위를 두면 성사적인(sacramental) 유형이요, 요청에 우위를 두면 종말론적(eschatological) 유형이다. 가톨릭교회는 전자에, 개신교회는 후자에 속한다. 개신교의 등장은 가톨릭교회의 성사적이고 성직자중심적인 구조의 왜곡과 마성화(demonization)때문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톨릭교회가 지속적 생명력을 갖는 이유는 개신교의 종말론적-예언자적인 구조로부터 초래되는 공허함과 세속화 때문이다. 따라서 개신교는 가톨릭교회의 성사적인 요소를 항구적인 교정수단으로 갖고 있어야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다. 존재의 성스러움에 기초하지 않는 개신교는 문화적 행위주의(cultural activism)와 도덕적 이상주의(moral utopianism)에 함몰되기 쉽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종교상황을 논하면서 틸리히는 당대가 기독교의 상징의 힘을 상실한 시대라고 진단한다. 개신교는 자유주의 신학 뿐만 아니라 정통주의 신학에서조차 가톨릭교회의 신비주의 전통에 잘 보존되어 온 기독교 상징의 신비주의적 의미(mystical meaning)를 탈색시켰다. 그런데, 틸리히에 따르면, 개신교가 그 자체로 반신비주의적인(anti-mystical)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신비주의적 요소는 종교의 필수적이고 일반적인 범주이고, 따라서, 개신교 역사 속에서도 야콥 뵈뫼(Jacob Boehme)나 조지 폭스(George Fox)와 같은 특별한 유형의 신비주의를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개신교의 종교적인 성격을 보존해 온 것은 개신교의 여러 형태들 속에 들어 있는 신비주의적 요소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보자면 신비주의가 반개신교적이라고 해서 거부하는 것은 옳지 못하며 심지어 파괴적이다.

명상(meditation)과 관상(contemplation), 탈아(ecstasy)와 “신비적 연합”(mystical union)의 자리를 허용하지 않은 개신교는 더 이상 종교가 아니게 되었고, 그 결과, 전통적인 종교 용어를 사용한다면, 지성적이고 도덕적인 체계로 전락해 버렸다. 퀘이커 예배의 신비적 “침묵”(the mystical silence)이, 적어도 의례의 형태로써, 개신교의 큰 그룹들을 잠식한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침묵이 진실로 신비주의적인 내용으로 채워진다는 것이고, 이러한 이유로 가톨릭 신비주의라는 어마어마한 저수지가, 행위주의와 도덕주의의 압력아래에서 영혼의 심층에 대한 접근을 상실한 채 정신분석이나 심리치료의 도움을 받아 그것을 다시 발견하려는 개신교인들에게-이는 개신교적 영혼의 돌봄(care of souls)의 결핍을 보여주는바-열려져야만 한다는 것이다.

틸리히가 주장하는 바, 개신교가 기초로 삼아야 할 가톨릭 성사주의와 신비주의의 구체적인 영적 실천은 명상, 관상, 탈아, 그리고 신비적 연합이다. 이와 같은 영적 실천의 기초 위에서만 개신교의 예언자적-종말론적 비판은 그 창조적 능력을 발휘할 수 있고, 행위주의와 도덕주의의 덫에 빠지지 않을 수 있으며, 나아가 개신교적인 영혼의 돌봄이 이뤄질 수 있다. 요컨대, 틸리히에게 영적 실천으로써의 기도와 기도 가운데 수반되는 신의 현존의 체험은 개신교의 종교성을 담보하는 필수요소이다. 그런데, 틸리히에 따르면, 성사적 종교의 요소로써 기도와 신비주의는 예언자적-종말론적 종교의 규정적 요소와 결합되어야 한다.“수직적 사유와 수평적 사유”라는 글에서 틸리히는 두 요소 중 어느 하나에 대한 배타적 강조의 위험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존재”(being)의 관점에서만 “궁극성”(the ultimate)과 연결되는 종교는 윤리적 역동성과 세계를 변혁시키는 의지와 힘을 결여한 채 세상을 거부하는, 정적인 신비주의 (world-defying, static mysticism)라는 결과를 낳는다. “요청”(ought to be)의 관점에서만 궁극성과 연결되는 종교는 영적인 실체와 세계를 변혁시키는 의지와 힘을 상실한 채 세상을 통제하는 기계적 행위주의 (world-controlling technical activism)로 이어진다.

틸리히는 이 글에서 시간과 영원의 관계를 보여주는 상반되는 메타포로써 “수직성”(the vertical)과 “수평성”(the horizontal)을 활용하는데, 이 두 메타포는 하나의 종교 안에서 변증법적으로 통합되어야 한다. 수직성은 인간 존재의 근원이자 인간 삶의 궁극적 의미로써의 영원(the eternal)의 현존을 지시한다. 이는 틸리히의 1941년도 소논문에서 밝혀진 성사적 유형의 종교의 요소에 상응한다고 볼 수 있다. 수직성은 인간의 개인적, 사회적 실존 가운데 유한성으로부터 오는 피할 길 없는 불안과 죄의 파괴적 절망을 넘어서는 능력과 관계되어 있는데, 실존의 변화무쌍함과 맞닥뜨린 상황에서의 기도와 명상, 미학적 직관과 철학적 에로스, 신비적 연합과 “영혼의 고요”(the quiet of the soul)로써 표현된다. 반면, 수평성은 영원이 현현될 때 수반되는 변혁적인 힘을 지시한다. 이것은 예언자적-종말론적 유형의 종교와 상응하는 것으로써, 사회정의와 개인적인 의를 위한 예언자적 투쟁, 인간 영혼과 공동체의 악의 구조에 대한 저항, 그리고 인간과 세계의 형성을 위한 윤리적 노력으로 표현된다. 틸리히의 관찰에 따르면, 종교의 미래는 수직성과 수평성이라는 두 요소의 새롭고 창조적인 연합의 여부에 달려 있다.
이상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틸리히에게 기도, 관상, 그리고 신비주의는 종교의 필수적, 일반적 범주에 속하는 영적 실천으로써 개신교의 고유한 종교성이 창조적으로 발현되기 위한 기초이다. 그리고 종교의 두 요소, 곧 성사적-종말론적, 수직적-수평적 요소의 창조적인 연합은 틸리히의 기도 신학의 기본적인 골격을 형성한다.

III. 틸리히의 기도 이해

틸리히의 기도 신학의 고찰이라는 본고의 목적 달성을 위하여 우리는 그의 기도에 대한 두 개의 정의적 표현을 살펴보고자 하는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그는 기도에 관한 체계적이고 종합적인 저술을 시도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기도 이해는 구성적 작업(construction)이 될 수밖에 없다. 이 구성적 작업을 용이하게 하는 하나의 방식으로써 그의 기도에 대한 정의적 표현들을 분석하려는 것이다. 둘째, 틸리히의 기도의 정의적 표현들을 분석하자면 자연스럽게 그의 신학의 요체에 접근하게 되는데, 이 과정 속에서 기도에 대한 개신교 신학적인 주제들을 간략하게나마 확인할 수 있다. 셋째, 영적 실천의 하나인 기도는 하나님, 세계, 그리고 인간의 삶에 대한 기독교적 비전과 이해로부터 분리될 수 없는 바, 틸리히의 기도 이해를 그의 신학적 주제들과의 연관 속에서 살펴보는 일은 틸리히의 영성 신학, 나아가 개신교적 영성의 한 모델을 구성하는 미래의 작업에 일정한 기초를 제공해 줄 수 있을 것이다.

1. 기도는 근원으로 돌아가려는 영적인 갈망이요 욕동

먼저, 틸리히의 설교, “영적 현존”(Spiritual Presence)에 나오는 기도에 대한 정의를 살펴보자. “기도는 유한한 존재가 근원으로 돌아가려는 영적인 갈망이다.” (Prayer is the Spiritual longing of a finite being to return to its origin.) 영적 현존은 틸리히의 성령론적 개념으로써 성령의 임재의 효과 혹은 힘을 지시하는데, 이는 인간의 영으로 하여금 자기를 초월하여 자기 힘으로는 얻을 수 없는 것, 곧, 사랑과 진리, 그리고 성스러움(the holy)에 다다르는 상태이다. 틸리히가 기도의 정의를 영적 현존이라는 맥락에서 시도하는 것이 주목할 만하다.

성령은 영적인 현존을 통하지 않고서는 누구라도 가질 수 없는 기도의 힘을 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언어를 사용하든지 사용하지 않든지, 목적을 성취하는 기도, 곧 우리의 존재의 신성한 근원과의 재연합(reunion)에 이르는 기도는 우리 안에서 그리고 우리를 통하여 말씀하시는 성령의 일입니다.”

틸리히에게 있어서 존재의 근원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그와의 재연합을 의미한다. 연합이 아니라 재연합인 이유는 존재의 근원과의 본래적인 연합(unity) 혹은 동일성(identity)이 인간에게는 영원히 잃어버린 현실이기 때문이다. 틸리히에게 기도는 신과 인간 사이의 신비적인 재연합을 향한 욕동이다. 단언하면, 기도는 신비적 욕동이다.
존재의 근원과의 재연합은 틸리히의 조직신학에서 삶의 세 가지 기능 중 하나인 “자기-초월” (self-transcendence)로써 설명된다. 자기초월은 삶 혹은 생명이 궁극적이고 무한정적인 존재를 향하여 수직적인 방향으로 분투하는 것을 일컫는 것인데, 이것은 모든 피조물에게 있는 갈망이요 욕동이다. 틸리히에게 있어서 자기초월은 성화(sanctification)와 연관되는데, 이는 기도와 명상과 같은 행위에 함장된 욕동이다. 이것은 마치 “전혀 다른 공기를 마시는 것, 평범한 실존 너머로 고양되는 것”과 같다. 놓치지 말아야 할 점은, 틸리히가 궁극적인 존재를 향한 ‘분투’(the struggle)를 존재론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자기초월은 인간에게 생래적으로 주어진 본능적 욕동이고, 이 욕동은 인간이 하나의 개별적 자기로 성장해가는 과정 중 결코 파괴되지 않으면서 내재한다.
기도에 대한 틸리히의 첫째 정의를 분석하면서 다음 세 가지가 두드러졌다. 첫째, 기도는 유한한 존재로서의 인간의 실존적인 행위로써 자기-초월 혹은 궁극적 관심을 향한 추구가 인지되고 기술되는 과정이다. 둘째, 재연합의 대상으로서의 존재의 근원은 틸리히의 신학에서 존재의 신비 혹은 신적인 심연 (the divine depth), 곧 신적인 존재의 접근하기 어려운 차원이기에, 기도는 인간적 자기의 심층적 차원에서 발생한다. 셋째, 기도는 신적인 근원과의 신비적인 연합을 향한 갈망 혹은 욕동과 관계되어 있다.
위에서 살펴 본 바, 틸리히의 기도의 정의를 상기한다면, 우리는 왜 틸리히가 기도를 계시론적 맥락에서 강조하고 있는지 이해하게 된다. 『조직신학』(Systematic Theology) 제 1부에서 그는 기도와 계시의 상관성을 다음과 같이 밝힌다.

모든 기도와 명상은 그 의미를 완수하게 될 때, 곧, 피조물이 그 창조의 근원과의 재연합을 이루게 될 때, 계시적(revelatory)이다... 기도와 명상은 주관적 이성과 객관적 이성의 모든 일상적인 구조를 초월한다. 그것은 존재의 신비의 현존이며 궁극적 관심의 현실화이다.

틸리히에게 기도는 계시의 세 가지 표시(marks), 곧, 신비(mystery), 기적(miracle), 그리고 탈아(ecstasy)를 동반한다. 첫째, 기도는 존재의 신비와 관련된다. 존재의 신비의 현존으로서의 기도는 주체와 객체 관계를 선행하는 차원에서 발생한다. 이성과 계시의 상관관계(correlation)에 할애하는 『조직신학』 제1부의 전체 맥락을 고려한다면, 기도의 발생지점은 이성이 자기를 넘어 그 근원과 심연으로 내몰리는 지점이다. 이 지점에서 “부수어버리는”(shattering) 효과와 “변형시키는”(transforming) 효과가 발생한다. 둘째, 기도는 기도자안에서 “소스라치게 놀람”(astonishment) 혹은 “하나님의 현존에의 두려움”(the numinous dread)을 유발한다. 이것은 일상적인 현실의 견고한 기초가 완전히 흔들리는 느낌을 가리킨다. 셋째, 기도는 탈아적 경험이다. 탈아(ecstasy)는 틸리히가 종교적 체험 혹은 신비적 체험을 기술할 때 즐겨 사용하는 개념으로 영적인 현존의 초월적 성격을 지시한다. 탈아적 경험으로써 기도는 인간의 영의 자기초월을 가능케 하는데, 여기서 자기초월은 인간의 본질적 구조, 즉 통합된 자기를 파괴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기도 중 발생하는 탈아적 체험은 인간의 이성적 구조를 파괴하는 게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 이성의 좀 더 심층적인 차원으로 이동하게 한다. 이성의 심층적 차원이란, 4세기 이집트의 독거수도사였던 에바그리우스(Evagrius Ponticus)가 말했던 바, 욕심, 근심, 잡념, 그리고 과거의 기억들이 정화되고 극복된 상태에서 드리는 순수한 사고의 활동에 비견될 수 있다. 말하자면, 탈아적 기도에서 이성 혹은 지성은 정화되어 보다 순수한 상태로 나아간다.
탈아적 기도는 도취(intoxication)와는 구분된다. 틸리히가 이해하는 도취는, ‘종교중독’의 한 측면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은 개인적 책임과 문화적 합리성을 담보하는 영의 자기-통합적 차원과 자기-창조적 차원으로부터의 도피를 주요 요소로 삼는다. 영의 자기통합과 자기창조는 틸리히가 『조직신학』 제 4부에서 설명하는 바, 영의 기능으로서 각각 도덕과 문화의 규정적 요소이다. 도취에는 도덕적 자기통합과 문화적 창조성이 결여되어 있다. 그러므로 도취는 궁극적으로 파괴적이며, “공허한 주체성”(the empty subjectivity)으로 돌아가게 한다. 다른 저술에서 그는 이를 두고“마성적 탈아”(demonic ecstasy)라고 부른다. 반면, 탈아적 기도는 기도자가 살아가는 객관적 세계의 다양한 풍성함을 놓치지 않는다. 그 객관적 세계가 영적인 현존의 내적인 무한성에 의해서 초월된다 하더라도 말이다. 말하자면, 탈아적 기도는 기도자로 하여금 자신이 살아가는 세계의 다층적인 면들로부터 도피하게 하는 대신 그것들을 더 깊이 인식하게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기도는 주변 현실을 신적인 이끄심(the direction of the divine)의 관점에서 인식하는 것이다.

관상하는 사람은 우주의 존재론적 구조를 인식하는데, 그것을 영적인 현존의 영향 아래 모든 존재의 근원과 목적이라는 관점에서 탈아적으로 본다. 진지하게 기도하는 사람은 자기자신과 이웃의 상황을 인식하는데, 영적인 현존의 영향 아래에서 그리고 삶의 과정에 대한 신적인 방향이라는 관점에서 본다... 주체와 객체의 연합이 발생하여 각각의 독립적 실존이 극복되고 새로운 일치가 창조된다. 탈아적 경험의 최고이자 가장 우주적인 실례는 기도라는 형식이다.

틸리히에게 기도는 인식(awareness)이다. 그런데, 이 인식은 자기중심성을 벗어난 인식이며, 자기라는 감옥을 벗어나 사회적 그리고 우주적으로 확대된 인식이다. 자기초월적 인식으로써의 기도는 주체와 객체를 분리하는 대신 양자의 일치의 관점에서 사회적, 우주적 현실을 관조한다. 개인적 자기의 내면, 개인적 일상뿐만 아니라 사회-정치적 차원의 일상적 현실이 관상의 대상이 된다.
여기서, 주체와 객체의 일치의 관점이란 다름 아닌 영적 현존의 효과를 가리키는데, 위의 인용문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틸리히는 기도를 하나님의 활동의 한 측면, 즉,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믿음이라는 맥락에서 이해한다는 것이다. 섭리적 신앙을 가진 사람은 유한성과 소외의 인간적 조건을 주술적으로 혹은 초자연적으로 변개시키는 특별한 행위를 간구하는 게 아니라 신앙의 용기를 가지고 어떤 상황도 자신의 궁극적 운명의 성취를 좌절시킬 수 없으리라고 믿는다. 그러므로 기도는 “실존의 파편을 하나님께 내어드리는 것”이다.

하나님의 이끌어 가시는 창조성 (God’s directing creativity)은 기도, 특별히 탄원기도와 중보기도의 의미의 문제에 대한 대답이다... 기도는 하나님의 이끌어 가시는 행위의 조건이지만, 하나님의 창조성의 형태는 기도의 드러난 내용 (the manifest content)의 완벽한 거절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기도는 기도의 숨겨진 내용 (the hidden content), 즉 실존의 파편을 하나님께 내어드리는 행위의 관점에 보면 하나님께서 들으신 것이다. 이 숨겨진 내용이야말로 항상 결정적이다.

심리학자 프로이드가 <꿈의 해석>에서, 드러난 꿈과 드러나지 않은 꿈을 구분하면서 인간 정신의 무의식적 작용을 분석해 들어갔듯이, 틸리히는 기도를 ‘드러난 내용’과 ‘숨겨진 내용’으로 구분하면서 기도자의 표면적 언어의 발설 이전에 이뤄지는 실존의 내어드림에 주목한다. 명상이나 관상에서만 아니라 청원기도와 중보기도에서조차 기도의 질(quality)을 결정하는 것은 기도의 숨겨진 내용, 곧, 기도자의 실존의 내어드림이다. 실존의 내어드림, 이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믿음이다. 틸리히는 이렇게 말한다. “모든 진지한(serious) 기도는 힘을 가지는데, 이는 기도 안에 표현된 갈망의 강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끄는 행위, 곧 섭리에 대한 믿음 때문이다.” 기도의 힘으로서의 섭리에 대한 믿음은 용기(courage), 곧 “그럼에도 불구하고”(in spite of)의 성격을 갖는다. 이에 대해 부연해 보자.
『존재의 용기』(Courage To Be)에서 틸리히는 루터와 개혁자들이 보여준 확신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믿음도, 의심과 무의미속에서 허우적대는 고갈된 자기(the depleted self)가 소생케 되는 가능성에 대한 신뢰도 아니라고 본다. 그에 따르면, 그들이 가졌던 확신은 하나님의 무한정성과 인간 실존의 유한성에 대한 받아들임(acceptance)이다. 무의미함과 죄의식, 그리고 죽음과 같은 비존재(nonbeing)의 위협은 여전하고, 인간의 실존은 깨어지기 쉬우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을 자신의 존재 안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는 상태, 그것이 믿음이다. 틸리히는 이를 두고 “절대적 믿음”(the absolute faith)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절대적 믿음은 하나님 체험의 대조적인 두 유형이라고 할 수 있는 신비적 연합(mystical union)과 인격적 교제(personal communion)를 포함하면서도 초월한다. 신비적 연합은 신비주의 전통에서 사용하는 상징적 개념으로써, 인간이 존재의 근원되시는 하나님에게 참여(participation)하는 것이다. 신비가는 존재의 근원에의 참여를 통해서 자신의 실존적 현실 속에서도 자기를 긍정할 수 있게 된다. 반면, 인격적 교제는 주로 개신교 경건주의 전통에서 발견되는 바, 한 개별적 인간이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경험하는 상태를 지시한다. 경건주의자는 하나님에 대한 인격적인 경험을 통해 인간적 연약함과 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존재가 받아들여짐을 경험한다. 요컨대, 기도의 힘으로써의 믿음은 비존재의 위협에 처해있는 인간 실존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자기존재를 긍정하게 되는 용기이다.
그렇다면, 절대적 믿음으로 기도하게 될 때 이 기도의 대상은 어떻게 표현될 수 있을까? 틸리히에 따르면, 절대적 믿음의 대상은 “하나님 너머의 하나님”(the God above God)이다. 하나님 너머의 하나님은 틸리히의 신학 전체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상징적 개념인데, 이는 위디오니시우적인 하나님으로서 “말할 수 없는 어둠”이요 하나님에게 부여된 이름들, 심지어 하나님(God)이라는 이름조차 사라진 상태를 표현한다. 다소 시적인 언어로 틸리히는 이렇게 말한다.

절대적 믿음 혹은 하나님 저편의 하나님(the God beyond God)에 사로잡힌 상태는 정신(the mind)의 다른 상태들과 별도로 나타나는 상태가 아니다... 그것은 항상 정신의 다른 상태들 안에서, 그것들과 함께 그리고 그 아래에서의 운동이다. 그것은 인간의 가능성들의 경계 위의 상황이다. 그것은 이 경계이다... 그것은 인간이 거할 수 있는 어떤 장소가 아니고, 언어와 개념의 안전도 없으며, 이름도, 교회도, 예배의식도, 신학도 없다. 그러나, [절대적 믿음은] 이 모든 것들의 심연(depth)에서 움직인다. 그것은 존재의 힘(the power of being)이다.

요컨대,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믿음으로써 기도는 인간의 언어와 개념, 그리고 제도와 의식을 넘어 존재의 힘에 사로잡히게 되는 경험이요, 이 경험은 기독교 영성의 이른바 ‘무념적(apophatic) 전통’에서 상술하는 신비적 경험의 한 단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2. 기도는 마음을 하나님께로 고양하는 것

『조직신학』 제1부에서 틸리히는 기도를 “인격의 중심인 마음을 하나님께로 고양하는 것”(the elevation of the heart as the center of the personality to God) 이라고 정의한다. 유사한 정의가 그의 여러 설교들 속에서 발견된다. “기도는 인간이 자기 자신을 영원을 향하여 고양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고요한 감사의 상태에 있을 때에는 하나님의 현존을 인식합니다. 우리는 생명의 고양(the elevation of life)을 경험하는데, 이 생명의 고양은 감사를 표현하는 수많은 말들을 수단으로 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것을 향하여 개방되어 있을 때에 발생하는 것입니다.” 이 표현들에서 우리가 주목하는 단어는 “고양”(the elevation)과 “마음”(the heart)이다.
먼저, 틸리히에게 고양은 기도의 신비적이고, 탈아적이며, 그리고 자기초월적 성격을 드러내는 표현이다. 틸리히의 기도 신학에 대한 분석적 연구를 감행한 바 있는 세바스찬 파이나다스(Sebastian Painadath)는 이 용어가 성 어거스틴, 토마스 아퀴나스, 그리고 마르틴 루터에 의해서 사용된, 기도에 대한 고전적인 정의라는 점에 주목하면서 틸리히가 이 고전적인 용어를 전유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파이나다스에 따르면, 고양은 세 가지 차원을 함축한다. 첫째, 고양은 은혜에 대한 수용적인(receptive) 경험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영적인 현존의 영향을 통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둘째, 고양은 또한 인간의 활동이다. 왜냐하면 영적인 현존의 영향 아래에서 인간이 자유로운 인격적 방기(self-surrender) 가운데 자신을 성령을 향하여 고양시키기 때문이다. 셋째, 고양은 신적인 것과의 초월적인 연합에 참여하는 것이다. 이 참여는 타자와의 만남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게 아니라 영원의 관점에서 시간에 참여하고 카이로스(kairos)의 힘 아래에서 현재의 상황을 바라보게 한다.
다음으로, 틸리히에게 마음이라는 단어는 좀 더 중요한 함의를 갖는다. 마음은 인격의 중심이다. 인격의 중심이란 인격의 무의식적인 요소를 포괄하는, 존재의 가장 심오한 근원이다. 따라서 마음이란 존재의 심층적 차원을 가리키는데, 여기에서 하나님을 향한 절절한 탄원이 흘러나온다. 그러므로 존재의 가장 깊은 곳으로서의 마음은 존재의 무한정적이고 무궁무진한 근원, 즉 하나님과 관계된다. 말하자면, 마음은 영적 식별의 주체이면서 하나님과의 연합의 장소이기도 하다.
틸리히는 실존주의 철학을 다루는 소논문에서 신비주의를 “생명의 심층(depths)과의 연합을 향한 믿음의 모험”이라고 정의하면서, 심층을 신비가들이나 철학자들의 자기성찰, 기도, 그리고 관상에서 발견할 수 있는 영적인 태도 혹은 신앙생활의 특성으로 이해한다. 심층의 경험은 익숙하고 편안한 삶과 결별하고 매우 고통스러울지 모르지만 결국에는 기쁨, 희망, 그리고 진리로 가득찬 미지의 근원 (the unknown ground)으로 내려오게 한다. 종합하자면, 틸리히에게 마음은 하나님과 인간의 신비적인 만남의 장소이고, 하나님을 향하여 마음을 고양시키는 행위로서의 기도는 실재의 새로운 차원을 열어 제친다.
여기에서 틸리히가 자신의 신비적 체험에 대하여 기술한 내용을 살펴보는 일이 유용할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에 군목으로 참전하던 중 틸리히는 휴가를 나와 베를린에 있는 프리드리히 대제 박물관에 들러 그림을 감상하다가 상드로 보티첼리(Sandro Botticelli)의 그림에 사로잡힌다. 그 그림은 <마돈나와 아기 그리고 노래하는 천사들> (Madonna and Child with Singing Angels)인데, 그는 이 그림을 보는 순간 깊은 관상으로 빠져들어, 스스로 이른 바,“계시적 탈아”(revelatory ecstasy)를 경험한다. 그는 이렇게 회상한다. “내가 한 경험에 대하여 계시적 탈아보다 더 나은 명칭을 나는 알지 못한다. 그 때까지 그저 암시적으로는 알고 있었지만, 덮여 있었던 실재의 어떤 경지가 내게 확 열렸다.” “이 경험은 우리가 일상적 삶에서 실재를 경험하는 방식을 넘어선다. 다른 식으로는 경험될 수 없는 심층(depths)을 열어 제치는 것이다. 이 같은 기술들을 살펴보면서, 우리는 틸리히가 기도를 마음의 고양으로 이해할 때, 이는 실재의 새로운 경지가 열리는 계시적 사건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신적인 것을 향한 마음의 고양으로서의 기도라는 틸리히의 정의는 “헤지카즘” (hesychasm)이라고 알려진 기독교 영성 전통 속의 “마음의 기도” (the prayer of the heart)라는 개념에 비추어 볼 때 그 의미가 보다 확연해질 수 있을 것이다. 토마스 머튼은 『관상적 기도』(Contemplative Prayer)에서 초기 수도사들에게 기도는 말씀의 묵상 (meditatios scripturarum)이었다고 지적하면서, 그들의 묵상은 성경말씀을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깊고 단순한 집중을 가지고 반복적으로 읽어내면서 기억하는 것이었다고 지적한다. 이와 같은 유형의 기도는 시나이 반도와 아토스산의 수도원들을 중심으로 창궐했던 헤지카즘적 관상 전통에서 발견되는 기도의 기술이다. 마음의 기도는 “침묵, 단순성, 관상적이고 명상적인 통일,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주의력 깊고 세심한 경청에 기반한 인격적 통합”을 이뤄내는 기도이다. 마음의 기도가 요청하는 적합한 반응은 “침묵 가운데 마음을 전적으로 내어놓는 것”이다. 머튼은 마음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한다.

“마음”이라는 개념은... 인격의 가장 깊은 심리적 근원이요, 자기-인식(self-awareness)이 분석적인 숙고를 넘어 미지의 그러나 “우리보다 더 우리 자신과 친밀한” 존재로 현존하는 심연 (the Abyss)에 대한 형이상학적이고 신학적인 맞섬(confrontation)이 벌어지는 내적인 성소이다.

위 인용구는 마음의 이해에 관한 한 머튼과 틸리히 사이의 유사성을 보여준다. 둘 모두에게 마음은 인격의 가장 깊은 근원으로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신비적 조우가 벌어지는 공간이다. 머튼은 이 장소를 내적인 성소라고 표현한다. 그런데, 특기할 만한 것은 하나님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도 두 사람은 유사성을 갖고 있다. 위의 인용구에서 머튼은 하나님에 대해 “우리보다 더 우리 자신과 친밀한”이라는 형용어구를 사용하면서 하나님을 “미지의 그러나 현존하는 존재”라고 규정하는데, 이는 틸리히도 차용하고 있는 바, 하나님의 무매개성(immediacy)에 대한 고전적인 어거스틴적 영성의 표현이다. 두 사람 사이의 신학적 연대는 1959년 9월 4일 소인이 찍힌, 틸리히에게 보낸 머튼의 편지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문화의 신학(The Theology of Culture)의 처음 몇 장을 읽었을 때 내가 얼마나 행복했는지 말하고 싶습니다. 그걸 읽으면서 나는 나 자신의 어거스틴적이고 프란치스코적인 본능이 인정받고 있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틸리히의 기도에서처럼 헤지카즘의 기도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기도자의 태도, 곧, 마음의 고양이라는 관상적 태도(contemplative attitude)이다. 관상적 태도를 통해 기도자는 하나님의 움직임, 이끄심, 그리고 초대에 대하여 단순하고도 기꺼이 열리는 자세를 증대시킨다. 기도자는 “점점 더 은혜에 대하여 순종적이고 협력적인 내어맡김(submission)의 상태가 되어가는데, 이것은 무엇보다도 점점 성령의 숨겨진 행위를 향하여 집중해가면서 수용적이 되어간다는 것을 암시한다.” 이것은 머튼에게 있어서 자기초월의 한 측면인 ‘상호성’(mutuality)에 상응한다고 말할 수 있다. 머튼은 이렇게 말한다.

수도원에서 이루어진 기도는 숙고(considerations)라기 보다는 마음으로 돌아가(a return) 자신의 가장 깊은 중심을 발견하고 자신의 존재와 생명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의 현존 속에서 자기 존재의 심층을 일깨우는 것이다... 기도 가운데 우리는 어떤 방법이나 체계를 찾아야 하는 게 아니라 어떤 태도와 전망(outlook)을 길러야 한다. 믿음, 개방성, 경청, 경외, 기대, 간청, 신뢰, 기쁨과 같은 것들 말이다.

틸리히에게 있어서 관상적 태도는, 부차적이고 일시적이며 유한한 관심에서 궁극적인(ultimate) 관심으로 이동하는 일과 관련된다. “인간의 마음은 무한자를 추구한다. 왜냐하면, 유한자가 쉬기를 원하는 곳이 바로 거기이기 때문이다. 무한자 안에서 유한자는 자신의 실현을 목도한다.”

3. 관상으로 이어지는 기도

틸리히의 기도에 대한 이해와 마음의 기도의 전통과의 비교를 통해서 우리는 틸리히가 개신교 신학자임에도 불구하고 기도의 관상적 차원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제, 그의 관상에 대한 이해를 보다 세밀하게 살펴보자. 틸리히의 관상 이해가 잘 드러나는 곳은 『조직신학』 제4부의 교회론이다. 그는 교회의 기능 중 하나인 예배를 거론하면서 예배의 세 요소로써 찬양(adoration), 기도(prayer), 그리고 관상(contemplation)을 꼽는다. 그는 로마서 8장 26절을 언급하면서 성령이 주도적으로 이끌어 가시는 “영적인 기도”(spiritual prayer)는 관상으로 이어진다고 말한다. 그에게 관상은 “주체-객체 구조를 초월하는 것에의 참여(participation)”인데, 영적인 현존의 경험은 관상에서 가장 명백하다. 그런데, 틸리히에게 있어서 관상은 기도의 특정한 방법이나 정도(degree)가 아니라, 기도 속에 드러나는 신비적 특질(mystical quality)이다.

관상 경험 속의 성령의 현존은 우리가 종종 중세 신비주의에서 발견하는 관념, 곧, 마치 명상에서 관상으로의 이동에서와 같이, 관상은 정도(degrees)에 따라 접근되어야 한다는 관념과는 반대된다. 그리고 관상 자체가 신비적 연합에 이르는 다리일 수 있다는 관념과도 반대된다. 이러한 점진주의적(gradualistic) 사고는 그것이 하나님을 포위된 성처럼 여기면서 그 성벽을 타고 올라가는 사람들에 의해서 정복되는 것처럼 여기기 때문에 종교의 모호함(ambiguities)에 속한다... 개신교 영역에서 관상은 정도가 아니라 특질(quality)이다. 곧, 관상은, 기도가 우리 안에서 올바른 기도를 만들어 가시는 하나님에게 향해진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는, 기도의 특질이다.

틸리히의 개신교 신학자적인 면모,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루터교 신학자적인 면모가 잘 드러나고 있는 위 인용구에서 그가 강조하려는 것은 다음의 세 가지이다. 첫째, 기도의 주체로서의 하나님은 수덕적 의지나 실천에 의해서 전유될 수 없는 존재이다. 하나님과의 연합 혹은 일치는 인간의 실존적 현실 속에서 오로지 파편적으로(fragmentarily), 그리고 미래적으로(anticipatorily)만 성취된다. 둘째, 칼빈주의의 성화론에서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바, 점진적인 영적 성장은 인간의 수덕적인 노력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틸리히에게 성화는 오르락내리락(up-and-down)하는 과정으로써, 인간 현실의 유한성을 점점 더 깊이 인식해가는 과정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하나님과의 신비적 연합은 영적 생활의 출발점이라기보다는 목적지이다. 셋째, 틸리히에게 있어서 신비주의는 종교의 본질적 요소로서 인정되지만, 동양의 신비주의나 서구의 일부 신비주의 전통에서 종종 보이는 자력구원적인 경향은 용인될 수 없다. 이를 두고 그는 『조직신학』 제3부에서 “신비주의적인 자력구원”(mystical self-salvation)이라고 부르는데, 이의 맥락은 예수 사건은 인간의 노력이나 의지로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은혜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틸리히가 이해하는 관상의 실질적 내용은 무엇인가? “종교철학의 두 유형”(The Two Types of Philosophy of Religion) 이라는 유명한 글에서, 틸리히는 이렇게 말한다. “인간은 주체와 객체의 분리와 상호작용 이전의 어떤 무조건적인 것(something unconditional)을 무매개적으로 인식한다.” 여기서, 인식이란 “직관,” “경험,”혹은“지식”과 같은 단어들 속에 함축된 내용과는 구별되는 것으로써, 실존적인 참여를 가리킨다. 관상은 무매개적인 인식으로 실재에 참여하는 것이다.“봄과 들음”(Seeing and Hearing)이라는 제목이 붙은 설교에서 틸리히는 관상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풀이한다. “관상(Con-templation)은 성전(the temple) 속으로, 성스러운 것의 영역 속으로, 사물의 깊은 뿌리로 들어가는 것이요 그 창조적인 근원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 설교에서 틸리히는 봄(seeing)의 신비적 능력에 주목하면서 봄은 연합시키는(uniting) 속성을 갖는다고 말한다. 어떤 대상을 친밀감 있게 바라보는 도중 우리는 그 대상과 연합된다. 친밀한 봄(an intimate seeing)은 사로잡는 동시에 사로잡히는 것이요, 이는 사랑으로 이뤄지는 봄이다. 요컨대, 틸리히의 기도 신학에서 관상은 주체-객체의 구조를 초월하는 존재의 근원, 즉, 존재 그 자체 (Being itself)에의 참여이다. 그러므로 틸리히에게 모든 기도는 자연스럽게 관상으로 이어진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진지한(serious) 기도라면 관상의 요소로 이어져야 한다. 왜냐하면 관상 가운데 기도의 역설(the paradox of prayer)이 명백해지기 때문이다. 기도의 역설이란 기도하는 자와 기도를 받는 자 곧 성령 하나님 사이의 동일성(identity)과 비동일성(non-identity)이다... 개신교 신비주의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느냐는 질문이 제기된다면 나는 관상으로 변형되는 기도(prayer transforming itself into contemplation)에 대해서 지금껏 말한 것을 언급할 것이다.

진지한 기도의 중요한 요소는 침묵이다. 침묵은 말없는 언어조차도 초월하는 것으로 오로지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영적인 현존 가운데 머무르는 것이다. 이 머무름 가운데 궁극적 안식과 참 자기의 감각을 발견한다. “외로움과 고독”이라는 제목을 붙인 설교에서 틸리히는 다음과 같이 호소한다.

침묵 가운데 머물면서, 언제나 고독을 갈망하고 있는 우리의 영혼이, 말할 수 없는 탄식을 하게끔 허용하는 게 더 낫습니다... 고독의 순간 뭔가 우리에게 일어납니다. 우리 존재의 중심, 홀로 있음의 근원되는 가장 내적인 자기가 신성한 중심을 향하여 고양되고 거기에 빨려 들어가는 것입니다. 거기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으면서 안식을 취할 수 있습니다.

또 다른 설교에서 틸리히는 이렇게 덧붙인다. 하나님은 “우리가 건네는 말을 알아들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의식적인 말들이 자라나오는 모든 무의식적인 성향 (the unconscious tendencies)도 알고 계십니다.” 요컨대, 기도 가운데 기도자의 가장 내적인 욕구와 욕망이 드러난다. 우리가 기도 중에 하나님에게 말한다고 생각하지만 그렇게 말을 건네는 대상은 실상 우리보다 더 우리 자신에게 가까운 존재이다. 이 존재는 기도의 대상(object)이 될 수 없다. 그는 언제나 주체(subject)이다. 그러므로 틸리히에게 기도의 주체로서의 하나님은 “나 자신과 모든 다른 이들 너머에 있어서, 내가 대화할 수 없는 존재이며, 내가 고요한 감사의 상태에 있을 때 내게 자신을 드러나는 분”이다. “우리는 가장 강도 높고 빈번한 기도를 통해서라도 하나님과 우리 자신의 간극을 연결할 수 없습니다.”
틸리히의 기도와 관상에 대한 이상의 분석을 통해 우리는 두 가지 점을 명료화하게 된다. 첫째, 관상은 노력으로 얻어지거나 전유될 수 있는 게 아니라 하나의 선물이다. 기도자는 궁극적인 신비를 향하여 관상적 태도를 가지고 열려 있고자 노력할 뿐이다. 틸리히에게 관상은 기도의 진행된 차원을 말하는 것으로써, 거기에서 기도자는 수동적인 역할을 맡아 자신을 개방하고, 수용하며, 감사의 상태에 머물고자 한다. 대신 성령 하나님께서 기도자를 탈아적 만남으로 이끄신다.
둘째, 틸리히의 관점에서 보면, 관상 중에는 누가 누구에게 말을 건네는 식의 주체-객체의 구조가 완전히 초월되고, 관상의 대상이 되는 것은 하나의 개별자(a person)로서의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 너머의 하나님”(the God above God)이다. 물론, 틸리히가 인격적인 하나님을 부르는 행위로서의 기도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조직신학』 제1부에서 그는 궁극적 관심의 실현으로서의 기도는 필연적으로 인격적 하나님이라는 상징을 포함하는 언어로 표현될 수밖에 없음을 지적한다. ““인격적 하나님“(personal God)이라는 상징은 말할 나위 없이 근본적이다. 왜냐하면 실존적인 관계는 인격 대 인격의 관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틸리히의 하나님은 하나의 개별자 혹은 존재가 아니라 존재 자체요 존재의 근원이자 심연이다. 그러므로 관상 안에서 인격적인 하나님이라는 이미지는 초월될 수밖에 없다. 이런 맥락에서, 그는 기도 속의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인격 대 인격의 대화로 국한되는 것을 기도의 “불경화”(profinization)라고 명명하면서 경계한다. 기도의 불경화는 주체와 객체의 대립을 넘어서는 무한자로서의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기도 이해에 있어서 인격적 대화라는 모델은 초인격적인 신적인 임재(divine presence)의 모델에 의해서 지양된다고 말할 수 있다.

IV. 틸리히의 기도 신학의 영성학적 함의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폴 틸리히는 기도의 관상적, 신비적 차원을 기도의 중심적인 역학으로 이해한다. 그에게 기도는 근원으로 돌아가려는 영적인 갈망이요 욕동이면서, 궁극적 관심을 향한 마음의 고양인데, 이는 탈아적이고 계시적인 사건으로써, 주체-객체 관계를 넘어서는 그 무엇, 곧, 존재의 근원과 심연에의 참여이다. 이제, 결론적 차원에서, 틸리히의 기도 신학이 갖는 영성학적 함의를 간략하게 제시해보자.
첫째, 틸리히의 기도 신학 안에서 기도와 일상적 삶이 연결된다. 틸리히의 기도 신학에 따르면, 기도자는 기도를 통하여 자신의 심층적 차원과 실존적인 주변현실에 대한 참여적 인식에 이르고, 이 과정 중에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믿음으로 죄의식, 무의미, 혹은 죽음과 같은 비존재의 위협을 극복해 나간다. 이러한 면에서, 틸리히의 기도 신학은 유한한 실존 속에서 존재를 긍정하며 살아가는 삶의 기술(art)이자 삶의 실제적 지침(guideline)의 기능을 갖는다고 볼 수 있다. 요컨대, 건강한 기도 신학의 한 모형으로서 틸리히의 기도 이해는 영적 실천으로서의 기도 그리고 기도의 실존적 토대로서의 일상적 삶을 매개한다.
둘째, 틸리히의 기도 신학은 개신교 영성 신학의 구성을 위한 단초를 제공한다. II장에서 살펴본 것처럼, 틸리히는 기독교 전통 속의 신비주의를 개신교의 예언자적-종말론적 비판과 상관(correlation)시키면서 이 양자의 통합적 역학을 바람직한 신학의 원리로 여긴다. 그리고 이 원리를 바탕으로 삼으면서 기도를 계시, 하나님의 섭리-창조적 행위, 영적인 현존과 같은 그의 신학의 주요 개념들의 의미연관 속에서 설명함으로써 개신교적인 영성 신학이 어떤 면모를 가질 수 있는지에 대한 단초를 제공한다.
셋째, 틸리히의 기도 신학은 기독교 영성 전통 속에서 발전되어 온 기도의 방법적 원리가 될 수 있다. 물론, 틸리히의 저술 속에서 기도의 구체적인 방법에 대한 언급을 찾기는 어렵다. 그리고 그의 개신교 신학자로서의 충실성이 그로 하여금 기도의 구체적인 방법에 대한 강조로부터 발생할지 모르는 ‘신비주의적 자력 구원’의 두려움을 만들어낸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의 기도 이해를 기독교 영성 전통 속에서 발전되어 온 다양한 기도법들에 대한 방법적 원리로 활용할 수 있는 여지는 많아 보인다. 틸리히의 기도에 대한 정의적 표현을 다룬 III장에서 살펴본 것처럼, 궁극적인 관심 혹은 존재의 근거와 심연인 하나님을 향한 마음의 고양으로서의 기도는 토마스 머튼이 이해하는 관상적 기도와 헤지카즘적 기도의 원리와 상통한다. 따라서 이를테면 머튼의 기도의 원리를 공유하면서 하나의 기도법으로 발전된 향심기도(centering prayer)에 대한 신학적 원리와 기초를 제시하는 데에 틸리히의 기도 신학을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틸리히가 상드로 보티첼리의 그림을 응시하면서 계시적 탈아의 체험을 했던 것과 그 경험을 기초로 그가 ‘봄’(seeing)의 신비적, 연합적(uniting) 성격을 기도와 관련시키는 점을 상기하면서 로욜라의 이냐시오가 발전시킨 복음 관상(Gospel contemplation)과의 연결점을 찾아보는 것도 흥미로운 작업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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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A Brief Study of Paul Tillich’s Theology of Prayer
Sanghoon Baek

This article considers the possibility of constructing a Protestant theology of prayer in exploring Paul Tillich’s understanding of prayer. For Tillich, prayer is the spiritual longing of a finite being to return to its origin and the elevation of the heart toward the ultimate concern. An ecstatic and revelatory event, it also has to do with participating in the ground and abyss of being that transcends the subject-object relation.
For the purpose of this study, we will take a brief look at Tillich’s typology of the philosophy of religion, which constitutes the background of his theology of prayer. In his thought, mysticism and contemplation are illustrated as the sacramental-vertical element of religion that is well preserved in the Catholic church, and Protestantism should make this element as the foundation of its creative development. In what follows, we will explore his definitive expressions for prayer, then, on this basis, sketch out spiritual theological implications of his theology of prayer. Tillich’s theology of prayer mediates prayer and everyday life, provides a basic matrix in which to construct an effective Protestant theology of prayer, and can be used as a methodological principle in incorporating various types of prayer developed in the tradition of Christian spirituality into the context of the Protestant church.

Key Words
spirituality, prayer, ecstasy, mysticism, contemplation, heart, Mert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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