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ngJo BBS


작성자
정재상
날짜
12/08/21 1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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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2012년 8월 전체 세미나 예수 영성의 다양성
 
 

사복음서의 영성
-예수의 다양한 영성의 관점에서-

유은호 목사


들어가는 말

신약성경의 사복음서는 성서신학적으로 보면 복음서라는 독특한 양식이다. 그러나 복음서를 영성신학적인 관점에서 보면 네 명의 복음사가들에 의해 쓰여진 <예수의 생애>를 다룬 ‘예수의 영성을 다룬 전기’라고도 할 수 있다. 사복음서의 관점에서 영성을 정의한다면 예수의 신앙유형을 영성이라고 정의할 수 있겠다. 그런차원에서 영성적 관점에서 보면 사복음서의 예수의 마지막 말씀이 다른 것은 각 복음서 공동체가 강조한 예수의 신앙유형 즉 영성이 다를 수 있다는 실마리를 제공한다. 또한 이것은 각 복음서 공동체가 자신들이 선호하는 예수의 영성을 강조하고 계승하고 있다는 증거도 될 수 있다. 만약 각 복음서의 예수의 마지막 말씀에 나타난 신앙유형의 주제가 각 복음서 전체를 지배하는 주제와 일치한다면 더 현격하게 그 공동체가 자신들이 선호해서 계승한 예수 영성의 흔적이라고 볼 수 있다. 신앙유형을 형성시키는 영성은 계승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강의는 사복음서 공동체가 계승한 예수의 다양한 영성을 기독교 영성사속에 나타난 영성가 혹은 영성운동을 식별적 차원에서 살펴보도록 하겠다. 예수의 영성을 온전하게 계승한 경우를 정파로, 약간 치우친 경우를 우파로, 많이 치우친 경우를 좌파로 규정했다(참조, 수 1:7, 조나단 에드워즈의『신앙감정론』). 필자는 이 강의를 통해 사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다양한 영성의 관점에서 내가 선호하는 영성만을 절대시하지 말고 다른 영성도 예수의 영성으로 인정하고 받아 드려야 할 필요가 있음을 말하려고 한다. 그래야 내가 선호하는 예수의 영성을 온전히 계승하고 우로나 좌로 치우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I. 마태복음은 예수의 말씀영성을 계승하였다.

마태복음의 예수의 마지막 말씀인 마태복음 28장 19-20절은 예수의 말씀영성을 보여주는 결정적인 증거본문이다. 마태의 예수는 마지막으로 모든 족속에게 가서 말씀을 가르치고 지키라고 명령하신다. 마태복음에는 예수께서 말씀을 가르치신 것이 43.2%, 이적은 13.2%, 기도는 3.1%, 목양은 4.9%로 나타난다. 마태복음에 예수의 말씀영성은 설교와 성경공부 방식으로 나타난다. 마태공동체는 이러한 예수의 말씀영성을 자신들이 선호하는 영성으로 계승하였다.

1. 기독교 영성사속에서 예수의 말씀영성을 계승한 영성가들
<세계 영성가 정파>

1) 렉시오 디비나 (Lecio dvina, 3-4세기)

초기 동방의 사막의 수도사들을 중심으로 일어난 렉시오 디비나의 초기형태는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형태로 나타난다. 이것은 서방 베네딕트 수도원에서도 렉시오 디비나가 아직은 관상(contemplatiom)까지 발전되지 않은 초기 형태를 보인다. 그러나 점차 수도원안에서 렉시오 디비나가 발전하면서 12세기 까르투시오 수도사 귀고 2세에 와서는 읽기(Lectio)-묵상(meditatio)-기도(oratio)-관상(contemplatio)의 4단계로 체계화된다. 그러나 1184년 카르투시오 수도회 회원 아담(Adam)은 귀고 2세의 관상을 빼고 행동actio(lectio-medita tio-oratio-actio)을 넣기도 한다. 루터도 기도(oratio)-묵상(meditatio)-시련(Tentatio)의 3단계로 변형시키면서 Lectio를 meditatio안에 흡수시키고 contemplatio 대신 Tentatio를 강조한다. 결국 동방, 서방, 개신교회가 렉시오 디비나에서 공통적으로 강조하고 있는 것은 Lecio와 meditatio을 공통으로 강조한다. 렉시오 디비나는 예수의 말씀영성을 읽고 묵상하는 영성으로 계승하였다.

2) 도미니꼬 (Dominigo de Guzman, 1170-1221/51세)

도미니꼬는 1170년 스페인에서 태어나 도미니꼬 설교수도회를 창설한 수도사이다. 도미니꼬는 이단을 척결할 목적으로 설교수도단체를 설립한다. 비록 처음 도미니꼬가 수도회를 세울 때 회원은 남자 조카 한명과 여자 조카 두명 이었지만 도미니꼬의 사명은 참 진리이신 하나님의 말씀에 의존하는 확고한 믿음을 갖도록 이단들을 설득하는 일이었다. 도미니꼬의 어머니 요안나가 도미니꼬가 태어나기 전에 환상을 하나 보았는데 개 한 마리가 입에 횃불을 물고 세상 곳곳에 불을 지르며 다니는 모습이었다. 훗날 설교 수도회를 만드는 사명을 미리 본 것 같다. 대학시절 도미니꼬가 자기 몸의 일부로 생각하고 읽었던 책은 카시안의 회의록과 마태복음서와 바울서신이었다. 도미니꼬가 복음서 중에 예수의 말씀영성을 강조하는 마태복음을 깊히 사랑했다는 것은 말씀에 대한 그의 관심의 반영으로 보여진다. 도미니꼬는 예수의 말씀영성을 설교 형식으로 계승하였다.

3) 필립 야곱 스패너(Phillip Jacob Spener, 1635.1.13-1705.2.5/70세)

1635년 독일에서 태어난 스패너는 독일의 경건주의 운동을 일으켰던 루터파 목사중에 하나이다. 1670년 스패너는 몇 명의 교구민들의 요청으로 영성개발을 위한 최초의 사적인 모임을 매주 월요일과 수요일에 스패너의 집에서 시작했다. 남성과 여성이 모두 참석하였으나, 각기 구별하여 앉았으며, 발언권은 남성에게만 주어졌다. 모임은 기도로 시작했고, 전 주일의 설교에 대하여 토의하거나, 경건서적을 읽었다. 후에는 성경을 읽고 그것에 대해 토론하였다. 스패너는 성경, 특히 신약을 부지런히 읽을 것을 강조했다. 회중들은 목회자의 지도하에 모여서 성경의 한 부분을 택하여 큰 소리로 읽고, 각 절의 단순한 의미를 찾아내기 위해 깊게 논의하였며, 누구나 자신이 지니고 있는 의심을 발표하여 충분한 설명을 구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스패너는 평신도들이 훈련없이 계속 설교만 듣는다면 그 설교를 충분히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평신도들이 부지런히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해야 한다고 말했다. 스패너는 평신도들에게 소모임 성경공부를 통하여 말씀을 더 분명하게 가르쳤다. 스패너는 예수의 말씀영성을 성경공부 형식으로 계승하였다.

4) 찰스 스펄전 (Charles Haddon Spurgeon, 1834.6.19-1892.1.31/58세)

찰스 스펄전은 1834년 영국에서 태어난 평신도 사역자로서 청교도 신앙을 계승한 사람이다. 그는 대학도 나오지 않았고, 신학도 공부하지 않았으며, 정식으로 목사안수를 받지도 않았다. 그러나 침례이후 주일학교 설교를 시작으로 설교사역을 시작하였다. 22세의 어린 나이에 매주 만명 이상에게 설교했다. 그는 6천여 좌석이 마련된 메트로폴리탄 교회에서 설교했다. 또한 만이천명의 좌석이 있는 서레이 가든 음악당에서 오랜 세월 성도들의 가슴을 적시는 설교를 했다. 그래서 스펄전을 이천 년 교회사에서 가장 탁월한 설교자로서 ‘설교의 왕’이라고 부른다. 지금까지 전해오는 설교만 해도 무려 삼천 오백편 이상이다. 스펄젼은 예수의 말씀영성을 설교의 형식으로 계승하였다.

<우파>

* 오리게네스 (Origenes, 185-251/66세)

오리게네스는 플라톤 철학에 깊히 영향을 받은 알렉산드리아의 동방 신학자였다. 플라톤에게 영향을 받은 오리게네스에게 있어서 “참된” 세계는 영적 영역이지 물질의 영역이 아니다. 이같은 전제는 “강생하신 말씀”, 즉 육신이며 물질의 세계에 강생하신 “말씀”에 대한 믿음과 맞지 않는다. 오리게네스의 신비사상의 중심이 된 “말씀”은 결국 그리스도가 중심이 된 오리게네스의 신비사상을 앞질러 나간다.(553년 제2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 이단 정죄). 오리게네스가 주로 사용한 우의적(Allegorical, 어떤 의미를 직접 말하지 않고 넌지시 일깨워 주는 성격) 성경해석의 시도는 성서신학적인 방법론을 경시하는 성경 본래의 의미를 왜곡해서 설명할 여지를 남겨 놓았다.

<좌파>

* 마르키온 (Marcion, 85-160/75세)

영지주의자 마르키온은 희랍철학에 근거하여 물질을 창조한 하나님을 거부하여 구약을 부정한다. 단지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일부와 바울서신 등 11권만을 성경으로 정하고 그 나마 그 내용도 자기 주관대로 가감하거나 수정하였다. 마르키온은 물질과 육체를 창조한 구약성서의 여호와 하나님(Demiurgus)은 열등한 신이며, 신약성서에서 예수가 가르친 영혼의 아버지 하나님과는 다른 하나님이라는 두 하나님 교리를 주장하였다. 마르키온은 성경의 정경성을 무시하고 부분적인 성경을 통하여 잘못된 신관을 보이고 있다.

<한국 영성가 정파>

5) 길선주 목사(吉善宙, 1869.3.15-1935.11.26/66세)

초기 한국 장로교의 대표적인 목사인 길선주 목사는 구약 전권을 30회, 창세기와 에스더와 이사야서는 540회, 신약 전권을 100회, 요한서신은 500회, 요한계시록을 10,200회 통독했다. 길선주 목사는 한국교회에 성경을 읽고 그대로 따르는 교회로 인도한 선각자이자 공로자였다. 길선주 목사의 아버지도 길선주의 전도를 받고 일흔살에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았는데 길선주 목사의 말씀영성에 영향을 받아 말년에 노환으로 병석에 누워 있으면서도 벽에 성경을 붙여 놓고 읽으며, 세상을 떠날 때 까지 줄곧 성경 읽기를 계속 했다. 길선주 목사는 평소에 강단에서 설교를 하다가 죽고 싶다고 말하곤 했는데 실제로 길선주 목사는 1935년 11월 25일 평안남도 고창교회에서 평서노회 부흥 사경회를 인도하던 중 마지막날 집회의 폐회축도를 마치고 그 자리에서 뇌일혈을 일으켜 쓰러져 죽었다. 길선주 목사는 평생동안 1만 7천회 이상 설교를 했다. 길선주 목사는 예수의 말씀영성을 성경통독과 설교를 통해 계승하였다.

6) 김치선 박사(金致善, 1898.8.10-1968.2.24/70세)

장로교 대신측을 세운 김치선 박사는 한국 최초 구약학 성서신학 박사이다. 그래서 주로 그를 목사보다는 박사라고 불렀다. 김치선 박사는 대한신학교를 세워 성경중심의 신학교를 세우려고 노력했다. 김치선 박사는 그 어떤 신학도 성경의 기록을 넘을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신앙의 근거였다. 김치선 박사가 남긴 『구약사기』는 한국인 최초의 구약학 박사가 쓴 책이라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김치선 박사가 당시 한국 최대의 교회인 남대문교회에서 목회할 때 평양신학교 후배인 한경직 목사가 남대문교회에 6개월간 참석하고 영락교회를 개척하기도 했다. 김치선 박사가 남대문교회에서 목회하던 당시 남대문교회 집사였던 박태선에게 이적이 나타나자 그를 불러 말씀을 잘 배우지 않으면 타락하게 된다고 여러번 경고 했지만 박태선은 그 말을 듣지 않고 결국 타락하고 말았다. 김치선은 성경통독만으로는 부족했던 당시 한국교회에 성서신학을 통해 성경의 바른 진리를 전하려고 노력했다. 김치선 박사는 성경에 대한 복음적인 성서신학이 부족했던 한국교회에 예수의 말씀영성을 성서신학적으로 계승하였다.

7) 옥한흠 목사(玉漢欽, 1938.12.5-2010.9.2/72세)

장로교 합동측 목사인 옥한흠 목사는 말씀을 통한 제자훈련에 강조점을 두고 목회 했다. 은퇴를 앞둔 2003년 6월 29 옥한흠 목사는 다음과 같이 설교했다. “내 마음의 현주소는 어디인가?” “이제 한 달만 지나면 제가 이 교회에서 사역한지 만 25년이 됩니다. 지금까지 25년 동안 저는 한 가지 일념 하에 목회해 왔다고 감히 말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을 떠나시면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간단히 요약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지키도록 하여 예수님이 원하는 제자를 만들라는 것입니다. 25년 동안 말씀을 가르쳐 제자 삼는 이 일에 우선 순위를 두고 목회해 왔는데, 한번도 이것이 뒤바뀐 적이 없었습니다. 좌우로 두리번 거리면서 방황한 일도 없었습니다. 따라서 지금 당장 제가 예수님 앞에 선다고 할지라도 감히 이런 말씀은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주님, 제가 부족한 종이지만 말씀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제자 만들라는 주님의 명령에 최선을 다해 순종해보려고 애썼습니다..." 옥한흠 목사는 말씀으로 제자를 삼는 성경공부식 제자양육사역으로 예수의 말씀영성을 계승하였다.

<우파>

* 다석 유영모(多夕 柳永模, 1890.3.13-1981.2.3/91세)

다석 유영모는 기독교인이며 한학자이고 동양철학자였다. 그는 성경과 유교경전과 불교경전과 기타 경전등을 비교하여 YMCA에서 수십년간 연경반강의(硏經班講義)를 통해 성경공부를 가르친 사람이다. 그러나 그가 1957년 YMCA에서 행한 다석강의는 종교다원주의적인 입장을 취하는 경향을 보인다. “예수가 이 사람의 스승입니다. 예수를 선생으로 아는 것과 믿는 것은 다릅니다. 이 사람은 선생이라고는 예수 한 분 밖에 모시지 않습니다.” “공자와 석가와 예수는 대장부(大丈夫)로서 여사부(如斯夫)로 꾸준히 가신 분들이 아니겠습니까? 이런 점에서 인생을 따지면 유교가 따로 있고 불교나 그리스도교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정신을 하나로 고동(鼓動)시키는 것 뿐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이 사람은 신앙이 없는 사람이 되고, 이단으로 보일 것입니다.” 다석 유영모는 성서를 중요하게 생각하여 연구했지만 종교다원주의적 관점에서 성경을 연구했다. 결과적으로 그의 성서연구는 예수의 말씀영성에서 빗나간 종교다원주의로 치우친 경향을 보였다.

<좌파>

* 문선명 (1920.1.6-현재/92세)

문선명은 1920년 평안북도에서 태어났다. 그가 썼다고 하는 원리강론은 자기가 다시 오실 재림주라는 관점에서 성경의 진리를 왜곡시키고 있다. ‘원리강론’에는 예수가 영적 구원은 이룩했으나 십자가에서 죽음으로써 육적 구원에는 실패했으므로 재림 예수는 인간의 육체적 구원을 위하여 사람의 몸으로 다시 태어나서 하늘나라를 선언한다고 주장한다. 원리강론의 마지막 결론은 이렇게 끝맺는다. “인류의 부모되신 예수님이 한국으로 재림하시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분은 틀림없이 한국말을 쓰실 것이므로 한국어는 바로 조국어가 될 것이다. 따라서 모든 민족은 이 조국어를 사용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다. 이리하여 온 인류는 한 나라 말을 사용하는 한 민족이 되어 한 나라를 이루게 될 것이다.”(원리강론, 513) 이것은 곧 육신으로 재림하는 예수는 바로 문선명 자신이라는 것을 간접적으로 암시하는 것이다. 마르키온이 성경의 교리를 고쳐서 두 하나님을 말하는 것이나 원리강론이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초림한 예수와 육신을 구원하기 위해 재림하는 재림주를 구분하여 두 그리스도론을 말하는 것이나 두 사람의 강조점이 유사해 보인다. 이러한 문선명의 성경관은 예수의 말씀영성을 심하게 왜곡해서 해석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II. 마가복음은 예수의 이적영성을 계승하였다.

마가복음의 예수의 마지막 말씀인 마가복음 16장 17-18절은 예수의 이적영성을 보여주는 결정적인 본문이다. 마가의 예수는 마지막으로 믿는자는 누구든지 이적을 베풀 수 있다고 말씀하신다. 마가복음 안에는 예수께서 이적을 베푸신 것이 26.6%, 가르침이 22.8%, 기도가 1.6%, 목양이 2.8%로 나타난다. 마가복음에서 예수의 이적영성은 귀신을 쫓고, 방언으로 하고, 병자를 고치고, 자연이적을 행하신다. 이적을 행하는 유형은 귀신축사는 주로 명령으로 쫓았으며, 병고침은 주로 손을 얹고 안수기도로 고쳤고, 자연이적은 명령을 통하여 기적을 베풀었다. 마가공동체는 이러한 예수의 이적영성을 자신들이 선호하는 영성으로 계승하였다.

1. 기독교 영성사속에서 예수의 이적영성을 계승한 영성가들

<세계 영성가 정파>

1) 네오카이사리아의 그레고리우스 (Gregory of Necaesarea, 213-270/57세)

3세기 네오카이사리아의 주교인 그레고리우스는 기적가(Wonder-Worker)로 유명하다. 갑바도기아의 3대교부 중 하나인 니사의 그레고리우스(335-394)의 친 할머니 마크리나 1세는 네오카이사리아의 주교인 유명한 기적가 그레고리우스의 제자였다. 니사의 그레고리우스는 자신의 할머니의 증언을 토대로 『기적가 그레고리우스의 생애(De vita Gregorii Thaumaturgi/ PG 46, 893-957)』를 썼다. 이 책에서 니사의 그레고리우스는 기적가 그레고리우스가 기적을 무수히 많이 행했다고 기록한다. ‘기적행사자’(Thaumaturgi) 그레고리우스는 예수의 이적영성을 계승하였다.

2) 베네딕도 (Benedictus, 480-547/67세)

베네딕도는 480년에 이탈리아에서 태어났다. 그는 529년에 베네딕도 수도원을 세운다. 그레고리오 대종은 『베네딕도 전기』를 쓰면서 전기 총 38장 중에 28장에서 기적을 행하는 베네딕도를 다룬다. 이 전기는 대부분이 기적이야기이고, 마귀를 쫓아내는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베네딕도가 죽은 아이를 고치는 것은 예수께서 소녀를 살리는 것과 유사하다. 빵 5개 밖에 없을 때 밀가루 이백포가 도착한 것은 예수의 오병이어를 연상케하고, 병든 하인의 나병치유는 예수의 나병 치유를 연상케 한다. 베네딕도는 엘리사같이 쇠붙이에 낫자루가 붙도록 한다든지, 모세같이 바위에서 물이 솟아나게 하고, 까마귀가 독이 든 빵을 멀리 내다 버린다든지, 엘리사가 게하시의 마음을 알아 맞추듯이 발렌티누스의 친형제가 음식을 먹은 것을 알아차린다든가, 엘리사같이 빈통에 기름이 넘쳐흐르게 하기도 한다. 바위아래에서 물이 솟아나게 하기도 한다. 그리고리오 대종은 베네딕도를 기적가로 전기를 쓰고 있다. 베네딕도는 예수의 이적영성을 계승하였다.

3) 윌리엄 시무어(William J. Seymour, 1870.5.2-1922.9.28/52세)

미국인 흑인 설교가 윌리엄 시무어가 주도했던 아주사(Azusa) 부흥운동에서는 방언, 신유, 표적들이 많이 나타났다. 시무어의 아주사 집회는 3년 동안 여러 교파와 인종들이 뒤섞인 가운데 매일 아침부터 저녁 늦게까지 계속되었다. 설교는 드물게 행해졌고, 대부분의 시간은 찬송과 간증과 기도로 진행되었다. 사람들에게 방언과 방언통역, 예언, 축사 등이 나타났다. 다른 나라말을 하는 방언이 나타나 즉시 외국으로 선교사로 떠나기도 했다. 성령의 각종 은사들 가운데 특별히 신유의 역사가 놀랍게 나타났다. 윌리엄 시무어는 예수의 방언과 신유의 영성을 계승하였다.

4) 스미스 위글스워즈(Smith Wigglesworth, 1859-1947.3.12/88세)

영국의 스미스 위글스워즈는 1900년대 초반 그의 집회에서 수 많은 병자들이 눈을 뜨고, 벙어리가 말을 하고, 앉은뱅이가 휠체어에서 일어나 걸었으며, 죽은 사람이 살아난 경우가 20명이나 되었다. 어느날 다섯살 된 아이가 죽었는데, 위글스워스는 모두 방 밖으로 내보낸 후에 관 안에 죽어서 딱딱하게 변해버린 아이의 시체를 두 손으로 번쩍 들어 올렸다. 그리고 나서는 아이를 벽에 기대어 세웠다. 그리고 예수의 이름으로 아이의 몸에서 사망아 떠나라고 꾸짖었다. 그 순간 죽었던 아이가 살아나기도 했다. 스웨덴 정부가 위글스워스가에게 집회를 할 때 병자에게 손을 얹고 기도하는 안수 기도를 못하도록 했다. 위글스워스는 각자 아픈 사람이 자기 손을 자기의 아픈 곳에 얹고 기도하라고 하는 순간 수백명의 사람들이 병에서 고침을 받았다. 위글스워즈는 예수의 신유의 영성을 계승하였다.

<우파>

* 알렉산더 도위(John Alexander Dowie, 1847.5.25-1907.3.9/60세)

알렉산더 도위는 1847년 에든버러에서 태어났다. 1870년 회중교회 목사로서 사역을 시작했다. 개인적인 치유를 경험하면서 국제성신치유 연합을 세운다. 1901년 도위는 시카고 북쪽 미시간호 해변에 5천명의 추종자들과 함께 시온 도성(the City of Zion)을 세운다. 성전 벽에는 보철기와 휠체어 그리고 다리를 저는 사람들의 각종 기구로 덮여 있었다. 하나님께 고침을 받은 물건이었다. 도위는 신정정치를 통해 공동체를 다스렸으며, 병원과 무도회장, 극장, 약국, 흡연, 음주를 금했다. 도위 혼자서 전체를 통제했다. 도위는 스스로 디자인한 제사장 복장을 입고 자신이 “엘리야”라고 말하기 시작했다. 그는 성공으로 단순한 삶의 방식을 버렸고 교만이 마음에 가득찼다. 마침내 1906년 도위는 비난을 받으며 제거되었고 강단에서 중풍을 맞았다. 1907년 도위는 쓸쓸히 죽음을 맞이하였다. 알렉산더 도위는 처음에는 성령으로 시작했지만 교만해지면서 성령의 치유사역이 떠나버리고 말았다. 예수의 이적영성을 온전히 계승하지 못하고 인간적으로 치우친 경향을 보였다.

<좌파>

* 몬타누스(Montanus, 2세기)

몬타누스는 주후 156년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며 자신을 가르켜 성령이 말씀하실 때 사용하는 수동적인 도구라고 선포하였다. 그는 탈혼 상태에서 그 지방의 신자들에게 이상한 언어로 말하면서 자기는 특별한 계시를 받은 자로 성령의 예언자로 자처 하였다. 심지어 예수가 여자의 모습으로 나타날 것이라고까지 예언했으며, 형체를 가진 영혼의 모습을 보았다고까지 주장했다. 또한 그들은 말씀을 선포할 때 강력한 웃음과 더불어 황홀경을 경험했다. 몬타누스는 프리기아의 페푸자(Pepuza) 마을 근처에 있는 광야에 천상 예루살렘이 건설될 것이라고 예언 했다. 신자들은 건조한 음식만을 먹으면서 극기했다. 재산은 아무런 가치가 없기 때문에 재산을 포기하고 예언자들의 생활 유지를 위해 봉헌했다. 몬타누스 예언자들은 동정생활을 찬양하면서 가능한 한 결혼생활을 포기할 것을 요구했다. 몬타누스의 페푸자는 알렉산더 도위의 시온도성과 박태선의 신앙촌의 원형같이 보인다. 몬타누스는 예수의 이적영성을 심하게 왜곡시켰다고 보인다.

<한국 영성가 정파>

5) 김익두 목사(金益斗, 1874.11.3-1950.11.29/76세)

장로교 목사인 김익두 목사는 황해도에서 목회를 할때 어느날 개울가에 있는 앉은뱅이를 위해 일주일간 금식하며 기도하다가 앉은뱅이를 고치는 역사가 나타나면서 그의 치유사역이 시작된다. 1920년 5월 30일자 동아일보 58호 기사에는 다음과 같이 기사가 실렸다. “벙어리가 말을 하고 앉은뱅이가 걸어 다니고, 부산진교회에서 부흥회를 인도하는 중 안수기도를 하여 앉은뱅이를 걷게 하였으니 두수이다. 두수는 부산진 좌전동 446번지 김낙언의 아들로 난지 8개월만에 우연히 앉은뱅이가 되었다가 8년만에 김익두 목사의 안수를 받았다. 안수받은 두수는 일어나 걷고 있는 것이다. 놀라운 이적이다. 밀양읍 교회의 18세 여자 벙어리가 말을 하고 있고 경남지방 22명의 불구자가 완전 완쾌되었다.” 김익두 목사의 부흥운동에서 이적기사가 나타나자 임택권 목사가 이적명증회를 조직해서 3년간이나 각처에서 나타난 이적들을 실제로 조사하고, 1921년에『조선예수교 이적명증』을 발행했다. 황해노회는 1922년 총회에 김익두 목사의 이적을 건의해서 장로회 헌법 제3장 1조, 곧 “금일에는 이적행하는 권능이 정지되었느니라”라는 조문의수정을 건의하였고, 총회는 다음 해인 1923년 이를 채용하여서 각 노회에 전달했다. 김익두 목사는 전국을 돌아다니며 부흥회를 했는데 이 부흥회에서 수많은 치유의 역사가 일어나 2만여명이나 치유를 받았다. 김익두 목사는 예수의 신유의 영성을 계승하였다.

6) 이성봉 목사(李聖鳳, 1900.7.4-1965.8.2/65세)

김익두 목사의 여덟명의 직제자중에 가장 대표격인 성결교 목사인 이성봉 목사는 수원에서 목회를 할 때 당시에 동네에 7개월째 전신 불수로 고생하는 무당이 있었다. 이성봉 목사가 사람들을 모아놓고 전도하고 있을 때 방에서 몰래 말씀을 듣고 있었던 무당이 방에서 눈물을 흘리며 예수를 믿겠다고 했다. 무당을 위해 손을 얹고 기도하자 전신마비에서 일어나 그 이튿날 주일에 예배당에 나와 새사람이 되었다. 1938년 평양 명촌 장로교회에서 집회할때 귀신을 쫓아내기도 했으며, 군산 구임교회에서는 삼년동안 앉은뱅이 였던 부인을 치유하기도 했다. 집회도중 병에 걸려서 집회를 못할 지경에 있을때도 그는 들것에 실려 다니면서 집회를 할 정도로 복음에 대한 열정이 대단했다. 이성봉 목사는 한강 백사장에서 천막을 쳐 놓고 부흥회를 인도한 것으로 유명하다. 당시에 이성봉 목사의 백사장 집회를 방해하러 왔던 이천석은 처음으로 영적인 도전을 받고 하나님을 믿게 되었고 후에 목사가 되었다. 이천석 목사는 이성봉 목사가 죽기 직전에 마지막 안수기도를 받기도 했다. 이성봉 목사는 예수의 귀신축사와 신유의 영성을 계승하였다.

7) 이천석 목사(李天石, 1929.6.20-1989.8.17/60세)

장로교 목사인 이천석 목사는 한국동란 때 오른쪽 다리를 잃고 방황하던 중 한강 백사장에서 부흥 집회를 하고 인도하던 이성봉 목사의 집회를 방해하러 갔다가 감동이 되어 그냥 돌아오는 일이 생겼다. 그 후 아내의 간곡한 부탁으로 기도원에 올라갔다가 자신의 아내를 위해 기도를 하던 중 갑자기 천정을 올려다 보았는데 갑자기 지붕이 뚫려지며 새빨간 불덩어리가 그의 머리위에 날아들었다. 그는 가슴이 뜨거워서 견딜수가 없었다. 예배당 마루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며 소리질렀다. 그러다가 갑자기 혀가 빨라짐을 느꼈다. 방언의 은사를 받은 것이다. 그 후 어느날 전차속에서 소아마비인 아이를 보고 있는데 마음속에 하나님이 가서 기도해 주라는 감동이 와서 창피함을 무릅쓰고 기도를 해주었는데 그 아이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창피해서 전차를 급하게 내려서 도망을 가다시피 했는데 몇 달이 지난 어느날 불광동의 어느 부흥회에 참석했는데 어떤 어머니가 나와 간증을 하는데 들어보니까 바로 그 전차안에서 자기가 기도해 준 그 아이의 어머니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간증을 통하여 이천석 목사는 자기를 통하여 역사하셨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이것을 계기로 그에게 신유의 은사가 크게 나타나 8개월 동안 귀신들린 사람 72명을 쫓았고 손을 얹어 기도하기만 해도 병이 낫는 역사가 일어났다. 특별히 당시 유명했던 축구선수 차범근 선수가 무릎부상을 당했을 때 이천석 목사에게 안수를 받고 고침을 받은 후에 독일에 가서 프로생활을 무사히 마치고 돌아온 이야기는 유명한 이야기이다(동아일보, 1977년 12월 24일자 4면). 이천석 목사는 한얼산 기도원을 만들어 한얼산 기도원에 오기만하면 개만 빼고 모두 방언을 한다는 유명한 말을 만들어 내기도 했다. 이천석 목사는 예수의 방언, 신유, 귀신축사의 영성을 계승하였다.

<우파>
* 정바울

정바울은 “내게 주님 능력 98%가 임했다”고 주장하며, 엘리야 겉옷사역, 모세의 지팡이 사역, 바울의 손수건 사역, 베드로의 그림자 사역을 한다고 주장한다. 신도들을 강단앞에 세워놓고 드럼 스틱을 들고 이 시간에 모세의 지팡이의 능력이 임할지어다. ‘휘이이이익~’ 그러면서 허공을 향해 드럼 스틱처럼 생긴 막대기를 휘두르면 앞에 가만히 서 있던 신도들의 인상이 찌푸려지며 몸이 구부러지기 시작한다. 배와 허리를 붙잡고 “으아아아악!!”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쓰러진다. 그리고 바닥을 뒹군다. 쓰러진 사람들 위에 손수건을 얹기 시작한다. 손수건에 바울의 능력이 있다고 주장하며 슛, 슈슈슈슛!!!” 구르는 사람들 몸 위에 손수건을 얹자 사람들은 또다시 ‘으으아아악!!’ 비명을 지르며 더욱 격렬하게 집회장소를 뒹군다. 그리고 보자기와 저고리를 휘두른다. “엘리야의 능력을 주겠다”고 외친다. 이것이 엘리야 겉옷 사역이다. 정바울은 예수의 이적영성의 모델과는 동떨어진 잘못된 신유사역으로 치우친 경향을 보인다.

<좌파>

* 박태선 (1917.11.22-1990.2.10/73세)

남대문교회 집사였던 박태선은 1955년 남산 공원에서 열린 부흥집회에서 수많은 사람들의 병을 고치는 신유의 역사를 일으켰다. 그 집회에서 사람들은 성령의 바람의 냄새를 맡은 사람들이 있었다고도 하고, 몸에 진동이 와서 말할 수 없는 희열이 왔다고도 한다. 신도들이 기뻐서 돈과 귀금속을 많이 바쳤다. 남산집회에서 신도들이 바친 돈과 귀금속만해도 몇 가마니가 될 정도라고 한다. 그렇게 은사가 충만했던 박태선은 돈과 귀금속을 보고 타락하기 시작한다. 1957년 자신은 만능이므로 한강물에 손을 넣고 기도하면 한강물이 변하여 휘발류가 될 것이라고 예언하기도 했다. 물론 실패로 돌아갔다. 박태선은 한국천부(天父敎)교를 만들어 자기가 하나님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 자칭 하나님도 결국은 1990년 2월 7일에 죽고 말았다. 박태선은 이적이 나타나자 교만하여 자신을 신격화 시키는 경향으로 흘러갔다. 이러한 점은 예수의 이적영성을 온전히 계승하지 못하고 지나치게 치우친 경향을 보인다.

III. 누가복음은 예수의 기도영성을 계승하였다.

누가복음의 예수의 마지막 말씀인 누가복음 24장 49절은 예수의 기도영성을 보여주는 결정적인 본문이다. 누가의 예수는 마지막 말씀으로 위로부터 성령을 받기 위해 기도하라고 하신다. 누가복음에는 기도가 7.2%(83절), 마태는 3.1%(34절), 마가는 1.6%(11절), 요한은 2.9%(26절)로 기록한다. 누가는 다른 복음서보다 평균 4배 이상 기도를 강조하고 있다. 누가복음에 나타난 예수의 기도는 개인기도. 금식기도, 산기도, 관상기도, 일상의 기도, 중보기도, 통성기도, 성령을 구하는 기도 등 다양한 유형의 기도가 나타난다. 누가공동체는 이러한 예수의 다양한 기도영성을 자신들이 선호하는 영성으로 계승하였다.

1. 기독교 영성사속에서 예수의 기도영성을 계승한 영성가들

<세계 영성가 정파>

1) 안토니(Antony, 251-356.1.17/105세)

동방교회의 평신도 출신으로 이집트 농부출신의 안토니는 수도사들의 아버지로 불리운다. 안토니는 마태 19장 21절에서 예수께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자에게 주라는 말씀에 감동을 받고 자신이 가지고 있던 전 재산 땅 253,368평을 팔아 가난한 자에게 나눠주고 고향 마을에서 멀지않은 한 동굴에서 10년 동안 기도생활을 한 후, 다시 몇 킬로 떨어진 동굴에서 20년동안 기도생활을 했다. 그는 기도중에 하루에 한끼의 빵과 소금과 물만 먹었다. 특히 고기나 포도주를 마시지 않았는데 이것은 다른 열성있는 수도사들 사이에서도 발견되지 않았던 점들이다. 20년이 지나 그의 친구 몇이 와서 기도하던 요새의 문을 강제로 부수고 열었을 때, 안토니의 몸은 이전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고, 운동 부족으로 살이 찌지도 않았고, 금식이나 마귀들과의 싸움으로 야위지도 않았으며, 그의 영혼은 깨끗했다. 슬픔으로 억눌리지도 쾌락으로 느슨해지지도 기쁨이나 낙담으로 동요되지도 않았다. 반오리게네스와 반신비주의의 입장을 취했던 아타나시우는『성 안토니의 생애』를 쓰면서 관상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는다. 이런점에서 안토니의 기도는 예수께서 한적한 곳에서 개인적으로 기도하신 개인기도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안토니는 예수의 개인기도영성을 계승하였다.

2) 아빌라의 테레사(Teresa of Avila, 1515.3.28-1582.10.4/67세)

깔멜 수녀회의 아빌라의 테레사는 관상기도가로 유명하다. 그녀의 자서전 『천주 자비의 글』에서 기도를 정원에 물을 대는 네 가지 방법으로 비유한다. 물통으로 물을 길어 나르는 방법(염경기도나 묵상기도), 펌프로 물을 퍼올리는 방법(단순기도), 냇물에서 물을 터 놓는 방법(관상기도), 비가 내려 물을 적시는 방법이다(하나님과 하나되는 기도). 더 나아가 데레사는 그녀의 대표적인 기도책『영혼의 성』에서 보다 더 명확하게 기도를 일곱 개의 궁방으로 비유하여 설명한다. 기도의 여정은 가장 바깥족의 첫째 궁방에서 마지막으로 왕이 거처하는 일곱째 궁방에 이르는 여정이다. 첫째 궁방은 기도에 완전히 초보자, 둘째 궁방은 기도를 정기적으로 하기 시작한 사람, 셋째 궁방은 기도중에 건조함도 위안도 함께 체험하는 사람, 넷째 궁방은 고요의 기도, 주입관상 체험, 주님에게서 오는 기쁨도 체험하는 사람, 다섯째 궁방은 합일의 기도, 주님과 일치에 사로잡혀 거기에 단순히 머물러 있는 사람, 성령을 넘치도록 받는 기도, 여섯째 궁방은 안팎으로 시련을 겪는 기간, 엄청난 위로와 특별한 기도의 은혜, 기도속에서 매우 심한 건조함을 체험하는 기도, 마지막으로 일곱째 궁방은 주님과 친밀한 일치에 머무는 영적인 혼인 상태, 주님과 친밀하고 깊이 일치하는 데서 오는 평화가 나타나는 기도의 단계를 말한다. 데레사의 관상기도는 수덕적인 단계에서 신비적인 단계로의 상승이다. 데레사는 아우구스티누스의 내면으로 들어가 기억속에서 삼위일체를 만나는 신비주의를 내면으로 들어가는 기도를 통해 왕과의 합일에 이르는 단계로 설명하고 있다. 아빌라의 데레사는 예수의 관상기도영성을 계승하였다.

3) 데이비드 브레이너드David Brainerd, 1718.4.20-1747.10.9/29세)

미국 청교도의 신학을 이어받은 데이비드 브레이너드는 미국 1차 대각성운동의 중심인물인 조나단 에드워즈와 부흥사 조지 휫필드의 영향으로 은혜를 받고 미국 인디안 선교사로 약 5년동안 사역을 하다가 폐병으로 죽는다. 그는 제일 먼저 인디언 언어를 배워 인디언어로 기도문과 시편을 번역해 준다. 그는 1년에 4천마일을 말을 타고 노숙하면서 인디언들을 위해 혼신의 힘을 쏟아 사역했다. 그런데 데이비드의 사역의 핵심은 기도에 있었다. 그는 어려움이 생길 때마다 숲속에 들어가 ‘은밀한 기도’를 드렸다는 말이 전체 읽기속에서 수없이 많이 나타난다. 조나단 에드워즈가 쓴 『데이비드 브레이너드의 생애와 일기』에 보면 은밀한 기도의 내용이 무엇이었는지 1742년 4월 28일 수요일 일기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깊은 평안과 고요함 속에서 늘 갔던 은밀한 장소로 갔다. 두 시간가량 은밀한 기도 속에서 보냈다...하나님께 무엇을 말씀 드려야 할지 몰랐다. 단지 그분의 품속에 기댈 수 밖에 없었다. 내 영혼은 모든 것에서 그분을 온전히 따르기를 갈망하는 호흡으로 가득하다...주님은 내 전부시다.” 그의 일기 전체는 기도문이라고 할 만큼 자신의 처절한 처지를 탄원시편를 쓰듯이 써내려갔다. 브레이너드가 짧은 시간 목숨을 바치며 인디언 선교에 큰 업적을 남긴 것은 홀로 하나님과 깊은 은밀한 기도를 함으로 얻은 힘으로 사역했기 때문이다. 브레이너드는 예수께서 사역을 멈추고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셨던 것 같이 브레이너는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신 예수의 개인기도 영성을 계승하였다.

4) 조지 뮬러(George Muller, 1805.9.27-1898.3.10/93세)

루터교 경건주의 운동의 영향을 받은 죠지 뮬러는 1835년 영국 브리스톨에 7살부터 12살까지의 부모가 없는 고아들 30명을 데리고 고아원을 시작했다. 30세에 고아원을 시작한 후 92세에 세상을 떠나기까지 63년간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며 중보기도로 고아원을 운영했다. 기도로 3천여명의 고아를 먹이고 입히고 교육시켰다. 그들을 교육시키기 위해 150만파운드, 현재 금액으로 400억원이 필요했는데 하나님께 중보기도를 통해 응답을 받고 사역할 수 있었다. 1862년 어느날 아침 300명의 아이들이 아침식사 할 음식이 없을 때 조지 뮬러는 믿음으로 기도했다. 이 기도에 하나님께서 한 빵 공장의 주인의 마음을 움직여 고아원 아이들에게 빵을 구워주어야 할 것 같은 생각에 잠이 오지 않아 새벽 2시부터 일어나 빵을 구워서 가져오는 기적도 일어났다. 우유가게 주인이 고아원앞을 지나가다가 수레가 고아원앞에서 망가져 열통의 우유를 그냥 주고 가기도 했다. 이 모든 것이 조지 뮬러의 중보기도의 응답이었다. 한번은 고아원에 보일러가 고장이 났을 때 기도를 하자 북풍이 변하여 남풍이 불기 시작했다. 작업이 진행되는 동안 포근한 기온으로 어려움없이 작업을 할 수 있었다. 죠지뮬러는 일생을 통해 기도로 5만번 이상의 기도응답을 받으며 고아원 사역을 했다. 죠지뮬러는 예수의 중보기도영성을 계승하였다.

<우파>

* 폰투스의 에바그리우스(Evagrius of Pontus, 346-399/53세)
에바그리우스는 터어키지역 출신으로 갑바도기아 학풍과 오리게네스의 영향을 받고 이집트의 사막 켈리아에서 기도생활을 했다. 그는 지성주의 전통, 즉 플라톤 철학에 속한 여러 사고의 골격안에서 생각했다는 점에서 지성주의자였고, 신비생활의 목표를 지성(누스, nous)의 최고활동으로 보았다는 점에서도 지성주의자였다. 에바그리우스는 순수기도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기도는 지성(intellect, nous)이 하나님과 나누는 대화입니다...기도의 상태란 지혜의 매혹된 영적 지성을 지극한 사랑을 통해서 지성 활동의 최고봉으로 이끌어가는 무정념(apatheia)의 상태입니다. 기도할 때 그대 안에 신성에 대한 어떤 형상도 떠올리지 마십시오 또한 그대의 지성이 어떤 형태의 인상도 쫓아가도록 내버려두지 마십시오. 반대로 무형의 것만을 좇으십시오. 그러면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물질적인 것에 동요되고 끝없는 근심에 휘둘린다면, 순수한 기도를 얻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기도는 모든 생각을 끊는 것이기 때문입니다...기도할 때에 눈을 치켜뜨지 말고 시선을 고정하십시오...수도승은 참된 기도를 통해서 천사와 동등해집니다. 기도할 때, 물질로부터 해방되고 모든 것을 벗어 버리는 지성은 복됩니다...” 천사를 순수한 지성으로보고 인간과 악마를 타락한 지성으로 보는 것은 플라토니즘 혹은 네오 풀라토니즘의 영향으로 보인다. 에바그리우스의 순수기도는 지성으로 하나님을 관상하고 알게되므로 에바그리우스의 주지주의적 측면은 신비철학으로 느껴졌기 때문에 후에 교회에서 이단으로 선고를 받았다(553년 제2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 이단 정죄). 에바그리우스의 순수기도가 마음을 비우는 작업을 한다는 의미에서 폰 발타살은 에바그리우스의 순수기도는 그리스도교적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불교적”이라고 평하기도 했다. 에바그리우스의 순수기도는 기도속에서 신의 형상을 배제한 지성주의로 치우친 경향을 보이고 있다고 보인다.

<좌파>

* 메살리안파 (4세기)

메살리안파(시리아어/Messalians-"기도하는 사람들)는 4세기의 동방교회의 신비주의 이단으로 극단적인 수도사들의 모임이다. 이 파의 지도자는 메소포타미아 사람 시므온으로 알려져 있다. 메살리안파는 죄를 극복하기 위해 쉬지 않고 기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교회의 공적인 세례와 다른 성례들, 그리고 전체 교회의 제도를 경시하고 귀신쫓는 일을 부정하면서 끊임없는 개인기도만이 효력을 발생시킨다고 주장했다. 모든 사람은 마귀에 들려 태어났기 때문에 기도 외에는 달리 쫓을 방도가 없으며 어떤 인간적인 노력에 의하기보다는 차라리 육체적 잠을 통해서 얻게 된다는 것이다. 메살리안 사람들은 사람 안에 들어있는 마귀를 자신들의 육체적인 눈으로 볼 수 있어서 신체의 어느 부분에 마귀가 있는지 자기들 손가락으로 가리켜 지적하여 쫓아 낼 수 있다고 했다. 사막교부들의 금언에 보면 사막교부 루키우스가 메살리안 수도사들과의 대화를 소개하고 있다. “메살리안 수도사들 중 몇 명이 루키우스를 만나러 에나톤으로 갔다. 루키우스가 그들에게 물었다. ”당신들은 손으로 무슨 일을 합니까? “우리는 수작업을 하지 않고 사도 바울이 말한 것처럼 쉬지 않고 기도합니다.” 루키우스가 그들에게 음식을 먹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그들은 음식을 먹는다고 대답했다. 그래서 루키우스는 그들에게 물었다. “음식을 먹을 때에는 누가 당신들을 대신하여 기도합니까? 그들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메사리안파는 후에 교회에서 이단으로 정죄를 받았다(431년 제3차 에베소 에큐메니칼 회의에서 이단 정죄). 메살리안파는 예수의 항상기도 하라는 기도영성을 지나치게 왜곡시켰다.

<한국 영성가 정파>

5) 이용도 목사(李龍道, 1901.4.6-1933.10.2/32세)

한국기독교사연구회는 1920년대 이후 한국교회에 대표되는 부흥사로 길선주, 김익두 이용도 목사를 꼽았다(한국기독공보, 2007년 6월 30일자 제2615호 27면). 감리교 목사인 이용도 목사는 13세부터 예배당 종각에 올라가서 여러 시간, 혹은 밤을 새워가며 기도를 하기도 했다. 1928년 이용도 목사는 통천에서 첫 목회를 시작했을 때 통천읍의 서북쪽에 있는 백정봉에 올라가 열흘동안 금식하며 기도를 하는 중에 변화를 받아 새롭게 거듭났다. 이때 함께 기도하러 갔던 청년 박재봉에게 말하기를 “내 들어가 엎드리거든 내가 일어날때까지 나를 깨우지 말고 만일 여러날이 걸리어서 혹 집에서나 교회에서 찾아오는 일이 있어도 내가 일어나기 전에는 나를 누구든지 일어나지 못하도록 해달라”고 부탁을 하기도 했다. 어느 부흥회에 가서는 수천명 성도가 모인 곳에서 기도를 시작한 후 대표기도만 4시간 이상 하고는 폐회를 선언하기도 했다. 1931년 어느날 새벽 사람들은 악박굴 약수터 곁 숲속에 사람이 죽었다고 신고를 했다. 순경이 가서 확인하니 이용도 목사가 그곳에서 기도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용도 목사의 등위에 낙엽이 수북하게 쌓여 낙엽을 헤치고 보니 거기서 이용도 목사가 기도를 하고 있었다. 이용도 목사는 예수의 산기도, 개인기도 영성을 계승하였다.

6) 전 진 원장(田鎭, 1912.12.27-1996.7.23/85세)

감리교 출신의 전 진 원장은 우리나라 최초의 기도원이라고 할 수 있는 대한 수도원에서 50년이상 나라를 위한 구국기도운동을 일으켰던 여성 중보기도자였다. 신학을 졸업한 전진 원장은 대한수도원에 합류하여 나라와 민족을 위한 구국기도를 하기 시작한다. 대한 수도원에 가보면 본당의 맨 앞에 ‘제단에 붙은 불을 끄지 말라’ ‘우리에게 한 제단이 있나니 우리의 겟세마네라’라는 표어가 붙어있다. 이것은 대한수도원이 끊이지 않는 구국의 중보기도를 드리는 곳임을 알 수 있다. 안내문에는 “대한수도원은 조국과 동족을 위해 기도하기 위하여 설립되었으며, 제단에 불을 끄지 않기 위하여 쉬지 않고 기도하는 기도의 동산입니다.”라고 씌어져 있다. 대한수도원은 한국교회와 민족을 위해 72년째 중보기도를 드리고 있다. 대한수도원의 영향으로 한국에는 여러 구국기도원 세워지기도 했다. 전 진 원장은 예수의 기도영성을 중보기도의 영성으로 계승하였다.

7) 최자실 목사(崔子室, 1915.8.15-1989.11.9/74세)

오순절 교단의 최자실 목사는 그가 하던 사업에 실패하고 삼각산에 올라가 자살을 하려다가 우연히 부흥집회에 참석하여 기도를 하다가 새벽 3시쯤 되었을때 갑자기 무거운 쇠떵이 같은 것이 가슴을 내리치면서 온 몸이 불덩이 처럼 활활 타오르며 방언을 하는 등 중생의 경험과 성령충만의 경험을 했다. 그 후 신학교에 입학을 했는데 신학교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성전에 올라가 홀로 철야기도를 시작했다. 철야기도를 두달째 계속하는데 기숙사 학생 중 아픈사람을 위해 기도해 주었는데 낫는 역사가 일어났다. 최자실 목사가 신학을 공부하고 대조동에 처음으로 천막교회를 개척했을 때 7년 동안 중풍병을 앓고 있었던 무성이 엄마가 있었다. 너무나 비참한 무성이 엄마를 위해 최자실 목사는 금식 기도에 들어갔다. 금식 기도를 하며, 철야 기도를 하면서 방언으로 기도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사흘동안 금식하고 기도하며 간호를 했다. 나흘째 되는 날 무성이 엄마가 전신을 일으키며 일어나려고 애를 썼다. 그러면서 ‘아줌마가 나를 붙잡고 기도할 때 갑자기 바람이 부는 것 같이 시원하더니 쏘고 저리던 것이 그치고 시원해져서 일어나려고 한다’고 말했다. 최자실 목사가 계속해서 방언으로 기도해주자 무성이 엄마의 중풍병이 완전히 고침을 받았다. 최자실 목사는 ‘최자실 순복음 금식기도원’을 지을때에도 열흘의 금식기도 중 소명을 받아 오산리 묘지 땅에 가서 매일밤 철야로 기도를 하면서 기도원을 세우기도 했다. 최자실 목사는 금식 기도와 철야 기도와 방언기도를 삼박자 기도라고 말하기도 했다. 최자실 목사는 예수의 기도영성을 금식기도와 철야기도와 방언기도의 영성으로 계승하였다.

<우파>

* 한에녹

한에녹 장로의 본명은 독립운동가 송계(松鷄) 한진교 선생이다. 한에녹 장로는 일제 치하에 조국을 떠나 중국에서 망명객으로 지내며 조국 해방을 염원하며 기도했다. 일곱번의 40일 금식기도를 행하며 직접 신적 계시를 경험하고 또 묵시 사상을 해석할 특별한 능력도 얻었다고 믿었다. 그의 독특한 종말 사상을 체계화하여『영원한 복음』이라는 책을 출판하기도 했다. 그는 예언으로 1948년 이스라엘의 독립연도를 맞추기도 했다. 그는 한걸음 더 나아가 다니엘서 12장 11절을 기초해서 예수의 재림이 2023년에 있을 것이라고 예언했다. 그러나 재림의 때를 계산하는 일은 성경의 말씀을 벗어나는 거짓 계시이다. 그런 차원에서 한에녹 장로는 예수의 기도영성을 신비적으로 치우친 경향을 보였다.

<좌파>

* 나운몽(羅雲夢, 1914.1.7-2009.11.26/95세)

나운몽은 경북 용문산 기도원의 설립자이다. 나운몽은 한때 불교에 귀의 수도에 몰두 하기도 했다. 그러나 여기서도 득도치 못하고, 계속 방황하다가 우연한 기회에 기독교로 개종하여 해방 전 경북 소재 용문산에 입산, 개인적 신앙생활을 했다. 그는 기독교의 부활과 불교의 해탈과 유교의 신선은 다 같다고 주장하였다. 다석 유영모가 지식적 입장에서 종교다원주의적 입장을 취했다면, 나운몽은 체험적인 차원에서 종교다원주의적 입장을 취했다고 할 수 있다. 나운몽은 1940년 혈혈단신으로 용문산에 입산한다. 1942년 어느날 밤 “네 마음을 청결케하라 그리하면 나를 보리라”는 영음을 듣고 예수를 믿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용문산에 기도원을 만들어 놓고 신비적 성령운동을 전개했다. 자기에게서 불이 나가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하면 불이 들어가 사람들이 뜨겁다고 했다. 어떤 경우에는 안수하고 손을 떼자 갑자기 뒤로 나자빠져서 15분가량 누워서 일어나지 못했다. 그러다가 나운몽이 기도해주자 즉시 일어나 앉았다. 온 전신에 소멸의 불이 임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1950년 6.25이후에는 본격적인 수도생활에서 입신, 방언, 신유, 예언, 진동 등의 신비적 체험을 했다고 한다. 나운몽의 성령의 직접계시, 예언, 진동, 사람에게서 불이 나와 다른 사람에게 들어가는 것, 뒤로 넘어지는 신비적 현상은 빈야드운동과 신사도주의운동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나는 현상들이다. 그런 차원에서 나운몽은 예수의 기도영성을 심하게 왜곡했다고 보여진다.

IV. 요한복음은 예수의 목양영성을 계승하였다.

요한복음의 예수의 마지막 말씀인 요한복음 21장 17절은 예수의 목양영성을 보여주는 결정적인 본문이다. 요한의 예수는 마지막 말씀으로 예수를 사랑하고 양들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신다. 요한복음에는 목양이 30.1%, 가르침이 24.1%, 이적이 14.6%, 기도가 2.9%로 나타난다. 요한복음에 예수의 목양영성은 예수를 사랑하는 것 같이 고난중에서도 순교의 각오로 양들을 사랑으로 목양할 것을 말씀하시는 것으로 나타난다. 특별히 요한복음 10장 16절은 우리안(교회)의 양만이 아니라 우리밖(불신자)의 양까지 목양의 대상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요한공동체는 이러한 예수의 목양영성을 자신들이 선호하는 영성으로 계승하였다.

1. 기독교 영성사속에서 예수의 목양영성을 계승한 영성가들

<세계 영성가 정파>

1) 아우구스티누스 (Aurelius Augustinus, 354-430/76세)

아우구스티누스는 서방교회의 대표적인 신학자, 철학자, 주교, 이전에 그는 수도사였다. 아우구스티누스는 76년의 생애 가운데 40년을 사제와 주교로 살았다. 그러나 그 40년은 수도사의 삶이기도 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사제가 된 뒤 곧바로 교회 옆에 수도원을 세우고 동료들과 함께 수도생활을 시작했다. 수도사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중요한 영성적 주제는 사랑이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삼위일체론』8권에서 이웃 사랑을 통해서만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기 때문에 사랑만이 현세와 내세에서 하나님을 볼 수 있게 해 준다고 했다. 시편 17편 주해에서도 우리가 지닌 사랑의 분량은 우리가 현세에서 하나님을 보는 척도라고 말했다.『삼위일체론』10권(8.11)에서는 사랑은 우리로 하여금 진실로 갈망하는 것을 굳게 붙들게 하는 “접착제‘라고 말했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 하나님을 향한 전진은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공동체적이다. 즉 교회의 품안에서 모두를 향한 ’사랑‘(caritas)의 실천에 의해서 발생한다고 주장한다. 『아우구스티누스 규칙서』1장 1절은 사랑으로 시작한다. ”친애하는 형제들이여, 먼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다음 이웃을 사랑할 것이니, 이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첫째가는 계명들이기 때문입니다.“ 규칙서 전체적으로 사랑을 강조한다. 이것은 성 빠코미오 규칙서, 스승의 규칙서, 베네딕도 규칙, 프란치스코 회칙과 차이를 보인다. 아우구스티누스 규칙서의 정신은 예수을 사랑하고 양들을 사랑하라는 요한복음의 목양영성과 맥을 같이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예수의 목양영성을 계승하였다.

2) 베르나르도 (Bernard de Clairvaux, 1090-1153.8.20/63세)

베르나르도가 속한 시토수도원은 그리스도를 신랑으로 삼고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신비주의를 추구했다. 베르나르도는 정통 아우구스티누스 계통의 기독론적 신비주의를 계승한다. 이러한 “영적결혼”의 단계는 인간의 노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먼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찾으시고 사랑하신 그 사랑안에 있다고 보았다. 그의 유명한 86편의 아가서 설교는 불타는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을 설교하고 있다. 베르나르도에게 있어서 사랑은 인간의 의지를 회복시켜 이웃의 아픔을 동경하는 이웃사랑을 통해 이웃을 아는 지식으로 이끈다. 베르나르도는 청빈의 금욕주의와 탈속의 정적주의를 중시한 부정신비주의와 함께 사랑의 실천운동과 현실 참여를 강조한 긍정신비주의를 강조했다. 즉, 자기 에고의 어두움을 그대로 인정하고 세상의 어두움도 그대로 긍정 하였으며, 그 어두움 속에서 어둠과 함께하는 일상적인 삶의 현장에서 사랑의 실천 행동으로 신과의 하나됨을 추구하였다. 즉 신과 만나는 내면으로의 침잠이 신의 의지를 실현하는 사랑의 실천 활동과의 균형을 회복하게 된 것이다. 베르나르도는 그의 책 『주 사랑하기』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네 단계를 소개한다. 첫 단계, 자신을 위해서 자기를 사랑한다. 둘째 셋째, 하나님 자신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한다. 넷째, 하나님만을 위하서만 자기를 사랑한다. 베르나르도는 진정한 의미에서 자기를 넘어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소개하고 있다. 베르나르도의 목표는 하나님을 사랑할 때 비로서 이웃을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베르나르도는 예수의 목양영성을 계승하였다.

3) 이냐시오 (Ignatius of Loyola, 1491-1556.7.31/65세)

이냐시오는 1491년 스페인에서 태어났다. 이냐시오는 동료들과 함께 예수회라는 활동 수도회를 만든다. 이냐시오가 쓴 기도훈련서인 『영신수련』은 다른 사람들을 기도의 체험속으로 인도하는 길잡이로 만든 것이다. 그러나 영신수련의 목표는 단순히 기도를 훈련하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 기도를 통해 하나님을 체험하고 삶의 현장으로 나가 사랑의 봉사로 투신하는 활동을 목표로 한다. 이냐시오의『영신수련』을 파악하기 위해 첫 번째로 방향 지워진 것은 그의 여행을 향한 비전이다. 이러한 비전은 『영신수련』의 마지막 <사랑을 얻기 위한 관상>을 향하고 있으며 첫 주부터 그 여행을 시작한다. 그러므로 『영신수련』은 전체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의 맥락속에 위치한다고 할 수 있다.『영신수련』의 맨 마지막 단어도 “하나님의 사랑”[370]이다.『영신수련』에서 마지막으로 제시되는 묵상이 바로 사랑이다. 물론 여기에서 사랑이란 피정자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사랑을 얻기 위한 관상>은 영신수련의 모든 묵상과 관상의 절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관상의 목적은 과거 전통적인 카르투시안적 관상을 벗어나 구체적인 삶의 현장으로 나아가 사랑으로 투신하라는 활동중의 관상에 동기를 부여한다. 그래서 이냐시오의 정신을 요약하면 활동중의 관상‘(simul contemplativus in actione)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다시말해 ‘활동중에서도 동시에(simul) 관상적이라는 것은 활동에 몰두가 곧 관상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예수회 회원들은 1시간 이상 기도를 권하지 않는다. 성무일도도 의무적으로 드리지 않아도 되는 유일한 수도회이다. 속된 말로 예수회 회원들끼리 하는 말로 예수회 회원은 소처럼 일해야 한다고 할 정도이다. 다시말해 세상을 향해 사랑으로 투신하는 활동을 하라는 것이다. 이것은 요한복음의 예수의 목양영성과 맥을 같이한다. 이냐시오는 예수의 목양영성을 계승하였다.

4) 윌리엄 부스(William Booth, 1829.4.10-1912.8.29/83세)

1878년 5월 윌리엄 부스는 런던에서 구세군을 창설했다. 구세군은 ‘스프와 비누와 구원’의 원칙을 바탕으로 세계적인 조직으로 성장했다. 1882년 석방된 죄수들의 사회 복귀를 위해 최초의 프리즌-게이트 홈이 문을 열었다. 2년후 윤락 여성들이 포주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을 살도록 돕는 레스큐 홈이 핸버리 스트리트에서 문을 열었다. 1887년에는 슬럼 스틀먼트가 문을 열었다. 또한 굶주린 사람들을 향해 화이트 채플에서 멀지 않은 아림하우스에 최초로 푸드 디팟을 세웠다. 윌리암 부스와 구세군은 특별히 사회의 개혁과 사회의 약한자들을 사랑으로 돕는일에 앞장섰다. 이것은 요한복음 10장 16절에 예수의 ‘우리에 들지 않은 다른 양에 대한 관심’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의 우리 밖의 양을 돌보는 행동이 곧 사회의 개혁으로 나타난 것이다. 윌리엄 부스는 사회개혁이라는 우리밖의 세상의 양에 대한 목양을 실천하여 예수의 목양영성을 계승하였다.

<우파>

* 위(僞)-디오니시우(Pseudo Dionysius, 5세기)

위-디오니시우는 주후 5세기 후반 동방교회의 수도사요, 신비가로 서방교회에 가장 많은 영향력을 끼쳤다. 그는 ‘신비신학’이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만들어 낸 사람이다. 그가 쓴『신비신학』에서 이상적 신비가는 먼저 정화를 거치고 나서, 관상을 획득하고, 하나님과의 연합을 획득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는 연합과 신화를 동일시하면서 새로운 형태의 변증적 신비주의를 시도했다. 디오니시우스는 황홀상태는 영혼이 자기밖으로 나가(탈혼)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것이라고 했다. 황홀상태는 무엇보다도 사랑의 황홀로서 하나님과 하나(henosis)되고, 신화(theosis)되는 것이라고 했다. 황홀경에 이른 영혼은 자기를 벗어나 사랑하는 대상에게로 쏠려 들어간다.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관계는 황홀한 사랑을 통하여 하나님과 하나가 됨으로써 이루어지는 체험이라고 했다. 위디오니시우스는 신플라톤주의 철학의 영향으로 하나님과의 연합의 신비를 신화의 단계까지 올라가야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루터는 1520년 공개적으로 “위-디오니시우스는 매우 유해한 인물이며, 그는 기독교보다 플라톤 철학을 받들고 있다”고 공격하기도 했다. 디오니시우스는 정통 기독론적 신비주의에서 벗어나 신플라톤적 신비주의로 기운듯한 인상을 준다.

<좌파>

* 영지주의 (Gnosticism, AD 2세기경)

영지주의는 주후 80년부터 150년 사이 나타난 기독교 최초의 신비주의 이단이다. 그노시스(Gnosis)는 신비적 합일을 통한 영적인 지식을 말한다. 그것은 합일(合一)의 지식이다. 영지주의자들이 말하는 구원은 천상 영적 세계에 속하는 구원자가 물질세계에 내려와서 신적 불꽃(씨앗)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만 몰래 그 비밀을 깨우쳐 줌으로써 구원이 이루어지는데, 이 비밀이 영지(Gnosis)이다. 영지주의의 궁극적 목적은, 사람들 하나하나가 모두 자신의 본질인 순수의식으로 돌아가 신과 하나되는 자기각성과 자기실현이다. 영지주의는 그리스도의 육체적 대속적 죽음과 그리스도의 육체적 부활에 대한 믿음을 통해 죄 사함을 받아 영육 간에 구원을 얻는다는 기독교의 구원론을 조잡한 것으로 배척한다. 영혼의 불멸이라는 플라톤적 교설이나 영적각성이라는 불교적인 영적 부활론을 선호하고 영적 세계로의 귀향이라는 신화론적 구원론에 집착한다. 영지주의의 신관은 신플라톤주의 신관에서 말하는 것처럼 인간이 일자(一者)인 신에게로 돌아가 신과 하나되는 자기각성과 자기실현을 주장한다. 이러한 영지주의의 신비주의는 신플라톤주의 철학과 불교의 신비주의를 섞은 혼합사상이다. 영지주의의 신비주의는 정통 그리스도교 신비주의에서 상당히 벗어나 있다.

<한국 영성가 정파>

5) 손양원 목사(孫良源, 1902.6.3-1950.9.28/48세)

손양원 목사는 장로교 목사로 애양원의 한센병환자 수용소에서 목회하면서 중환자실을 거침없이 드나들었다. 정상인이 출입하기 위해서는 입에 마스크를 쓰고, 손에는 장갑을 끼고, 발에도 장화를 신어야 한다는 규칙이 있었지만 손양원 목사는 그런 규칙은 안중에도 없었다. 피고름나는 손을 거침없이 부여잡고 장시간 대화를 나누곤 했으며, 한센병의 환부에는 사람의 침이 좋은 약이 된다며 입으로 피고름을 빨아내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걱정하는 사람들에게는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차라리 내가 한센병에 걸린다면 오죽 좋겠나 그러면 가까이 오지말라고 뒷걸음질치는 환자도 없지 않겠나, 언제나 웃고놀지 않겠나.”하고 말하기도 했다. 손양원 목사는 6.25전쟁때 김집사라는 사람이 급히 피난할 것을 권했지만 손양원 목사는 “여보, 김 집사님 고맙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난국에 무슨 일이 제일 급한 일이겠습니까? 양을 먹이던 목자가 그 양을 돌보아 이리떼 같은 악한 원수에게서 해를 받지 않도록 하는 것이 급한 일이 아닙니까? 나 한 사람이나 한 가정의 안정을 위해서 피신하는 것이 급한 일입니까? 사실로 우리 애양원 식구들이 전부 피할 곳이 있다면 나도 그들과 함께 피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렇지도 못할 것이니 내가 만일 피신을 한다면 일천 백명 양떼들을 자살시키는 것이나 다를 것이 무엇입니까?” 결국 손양원 목사는 한센병환자들의 교회를 끝끝내 사수하다가 공산군에게 순교 당했다. 손양원 목사는 예수의 양들을 위해 순교하는 순교적 목양영성을 계승하였다.

6) 김현봉 목사(金顯鳳, 1884.3.17-1965.3.11/81세)

김현봉 목사는 장로교 목사로 1932년 당시 토굴집과 판자촌이 대부분이었던 아현동에서 빈민목회를 했다. 김현봉 목사는 그곳에서 집 짓는 일을 도와 주기도 하고, 특히 일하지 못하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사는 집의 일을 도맡아 해 주었다. 분뇨통을 짊어지고 밭에 거름을 주면서 호박 한 개, 오이 한 개라도 결실해서 가난한 이웃에게 나눠주었다. 하루에 70여집에서 200여집까지 심방을 하며 교인들을 돌보았다. 김현봉 목사는 특히 교회건물을 크고 화려하게 짓는 일에 대해 반대하여 교인이 늘어나면 손수 교회의 벽을 헐고 교회를 넓히며 지붕도 벽도 손수 쌓아 올렸다. 건물의 미관에는 관심이 없었고 창문을 많이 내어 다만 위생적으로 태양광선이 잘 들고 예배에 편리하게만 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아현교회를 가리켜 '기둥교회' 혹은 '누더기교회'라고 불렀다.(김현봉목사 소천 당시 1965년 장년교인 1500명, 당시 영락교회 교인 2000명) 김현봉 목사는 토요일에는 걸인과 굶주린 사람들에게 흰쌀밥과 고기국을 끊여서 대접했으며, 100원씩 돈을 나눠주기도 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방을 주기도 했고 장사 자금을 대주기도 했다. 그래서 주일날에는 시내의 모든 거지들이 아현교회에 모여들기도 했다. 시골에서 올라 온 가난한 교인들에게는 집을 사서 방을 내주고 쌀을 사주면서 스스로 자립할 때까지 도와주었다. 김현봉 목사는 불신자도 장례가 나면 찾아가 직접 염을 하고 직접 리어커에 실어서 염리동 산에 가서 묻어 주었다. 김현봉 목사는 가난한 사람들을 사랑으로 돌보신 예수의 목양영성을 계승하였다.

7) 한경직 목사(韓景職, 1902.12.29-2000.4.19/98세)

한경직 목사는 장로교 목사로 1933년 예배당도 없고 자체내에서도 교회살림이 어려웠던 신의주 제2교회에 부임하면서 성전건축과 고아원인 보린원 설립을 동시에 추진했다. 한경직 목사는 4년동안 보린원 고아들을 보살피며 몸소 분뇨통을 메면서 고아들과 함께 지냈다. 그곳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고아들에게 몸소 보여주었다. 6.25이후에는 38선을 넘어 월남해 오는 실향민들을 위해 의식주를 제공했다. 피난민들을 위해서는 생활대책을 세워 도왔으며, 특히 전쟁고아들, 미망인들을 위해 고아원을 짓고 모자원을 세워 실제적으로 이들을 돕기도 했다. 의료봉사로 매주 가난한 교인들에게 무료치료를 해주었고, 무의촌에 국민건강을 위해 의료봉사대를 조직하여 파견하기도 했다. 한경직 목사는 6.25 전쟁중에 피어스 목사와 ‘세계 선명회’(World Vision)를 창설하여 전쟁, 재난, 기아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자선하는 일에 힘썼다. 1990년에는 ‘사랑의 쌀 나누기 운동’을 범국민적 운동으로 전개하여, 어려운 이웃에게 사랑나누기도 했다. 아프리카 동남아시아, 독립국가연합, 북한등 여러나라에 이 사랑을 나누는 일을 처음으로 시작했다. 한경직 목사는 ‘교회는 봉사기관이다. 인간을 잘 봉사함이 하나님을 잘 봉사함이다.’라는 목회철학의 원리대로 봉사에 전념했다. 한경직 목사는 우리 안의 양뿐만 아니라 사회의 가난한자들을 생각하는 우리 밖에 있는 양들을 사랑했던 예수의 선한 목자로서 예수의 목양영성을 계승하였다.

<우파>

* 변승우 (1963-현재/49세)

변승우는 그리스도인도 지옥에 갈 수 있다는 책을 통해 한국교회 양들에게 구원에 대한 혼란을 주는 교리를 선포하여 한국교회의 양들을 불안하게 만들어 결과적으로 구원을 위해서는 자신들의 교회에 참석해서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는 무언의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교인들은 환상이나 계시, 꿈을 통해 변승우가 위대한 목자라고 간증하고 있다. 심지어는 천국 도서관에 변승우의 책이 가장 귀한 곳에 전시되어 있다고 할 정도로 변승우를 찬양하는 분위기로 흐르고 있다. 외국의 유명한 예언자들을 통해 변승우의 위대성을 끊임없이 선전하기도 한다. 이같이 자신들의 교회의 지도자나 교회의 유일성을 주장하는 행태는 과거부터 이단들이 하는 전형적인 유형이다. 또한 정통교회를 비판하며 갈등구조를 역이용해서 자신들의 교회를 선전하는 형태를 보이며 갈등구조를 만들어 자신들의 교회론을 강화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이러한 행동은 참목자와 정통 교회론에서 벗어나고 있는 행동으로 보여진다.

<좌파>

* 박명호(1943.10.1-현재/69세)

안식교인이었던 엘리야 복음선교원(한농복구회)의 박명호는 중졸 후 고아원에서 지내다가 천호동 뒷산에서 환상을 보았는데 유명한 안식교 목사들이 양떼들을 멸망의 길로 끌고 가는 것을 보고 놀라서 “엘리야의 하나님, 나를 엘리야로 보내소서”라고 외치다가 깨어났다고 한다. 엘리야 복음선교원이 외견상으로 가장 강조하는 것은 ‘사랑’이다. 그래서 가정이나 교회, 사회에서 사랑을 느끼지 못하고 소외 되었던 자들이 쉽게 현혹되어 가정과 직장을 버리고 산속 은둔생활에 빠져든다. 박명호는 가난하고 초라한 ‘나뭇꾼 선생님’의 이미지로 신도들에게 자신을 강하게 부각 시켰다. 엘리야 복음선교원를 선전하는 팜플렛에는 나뭇꾼 박명호는 2천년전 예수의 생애와 꼭 같은 삶을 살고 있다고 선전한다. 팜플렛의 간증자들은 한결같이 박명호를 ‘사랑의 사람’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내부적으로 박명호는 ‘석선(石仙) 여호와’등으로 호칭되며 완벽히 ‘하나님’ 행세를 하고 있다고 한다. 박명호는 참 목자로서의 예수의 목양영성에서 지나치게 치우쳐 왜곡되어 있다고 보여진다.

나가는 말

사복음서 각각의 복음서에는 자신들이 선호하고 강조한 예수의 영성만 있는 것은 아니다. 각 복음서안에는 예수의 다른 영성도 함께 공존하고 있다. 각 복음서 공동체가 자신들이 선호하는 영성을 정파로 계승시킬 수 있었던 것은 자신들이 보다 덜 선호한 예수의 다른 영성을 오히려 인정하고 내면화시켰기 때문으로 보인다. 예수의 영성을 정파로 계승한 영성가들도 비록 자신들이 선호하는 영성을 강조했다고 하더라도 예수의 다른 영성을 무시하지 않고 인정하고 배우려는 자세를 가졌기 때문에 자신이 선호하는 예수의 영성을 정파로 계승하고 발전시킬 수 있었다고 보인다. 반면에 우파나 좌파는 예수의 다양한 영성을 배우려고 하거나 인정하지 않고 자신이 선호하는 영성만을 지나치게 집착하다가 신학적으로 빗나간 예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가 선호하고 좋아하는 영성이 있다해도 그것을 절대시하지 말고 언제든지 예수의 다른 다양한 영성을 배우려는 자세를 가져야 내가 선호하는 영성의 정파를 온전히 계승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복음서의 예수의 마지막 말씀은 모두 선교적인 지상명령의 맥락에서 주어진다. 이것은 각 복음서 공동체가 자신들이 선호하여 계승한 예수의 영성을 통하여 선교하고 전도하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의 경우 아마도 유교의 문화권에 있었던 불신자들이 예수를 믿으려고 할 때 마태복음 라인의 예수의 말씀을 강조하는 교회로 찾아 나올 가능성이 높다, 만약 샤마니즘의 무당종교의 영향을 많이 받았던 불신자가 예수를 믿으려고 한다면 마가복음 라인의 예수의 이적을 강조하는 교회로 찾아올 가능성이 높다고 보여진다. 불교의 영향권에 있었던 사람이 예수를 믿었다면 그런 사람은 누가복음 라인의 예수의 기도를 강조하는 교회를 찾아 나올지도 모른다. 아무런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은 무신론자라면 사랑을 강조하는 요한복음 라인의 교회를 찾아올지도 모른다. 하나님께서 예수를 통하여 다양한 영성을 보여주신 것은 그 영성을 통하여 여러 환경속에서 형성된 인간의 다양한 체질을 고려하여 그들을 복음안으로 들어오게 하려는 목적을 포함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사복음서가 말하는 예수의 다양한 영성의 목표는 복음안으로 초청하는 기능을 한다. 오늘날 교회를 찾는 많은 사람들은 다양한 영성적 기대를 가지고 교회를 찾는다. 그러므로 오늘 교회가 예수의 다양한 영성을 각각 계승하여 발전시킨다면 더 많은 사람들을 복음안으로 초청하는 기회가 될 것이다. 그리고 다양한 영성을 계승한 사람들, 교회들간에 갈등이 아니라 다양성 속에서 일치를 이룰 때 예수의 다양한 영성을 통하여 복음이 만민에게 전해지는 역사가 일어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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