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ngJo BBS


작성자
정재상
날짜
11/06/09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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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리뷰] 대중문화 영성과 기독교 영성 (이강학)
 
 

북리뷰_ "최성수의 <대중문화 영성과 기독교 영성>"

(* 이 글은 <목회와 신학> 2010년 12월 호에 실린 것입니다.)



이강학 박사



“영성”과 “문화”는 현대 한국 기독교인의 화두가 되었다. 영성이란 말은 “영성수련”, “영성훈련” “영성부흥회” “영성지도” “영성수련원” 등에서와 같이 교회 집회에서, 책에서, 그리고 매스컴에서 자주 들을 수 있게 되었다. 신학교에도 영성을 전공한 교수들이 늘어나고 있다. 문화에 대한 관심도 더욱 늘어나서 기독교와 문화의 관계를 연구하고 실천하는 단체들이 곳곳에 생겼으며, 문화에 관한 기독교 전문 잡지들이 발행되고, 카페를 중심으로 기독교 문화를 형성해서 지역사회를 섬기려는 운동들이 일어나고 있다. 이런 분위기에서 영성과 문화의 관계를 논하는 책이 등장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최성수의 <대중문화 영성과 기독교 영성>은 이 중요한 주제를 직접적으로 다룬 용기 있는 책이다. 문화와 관련한 폭넓은 자료 인용과 지적 분석과 통찰력은 곳곳에서 감탄을 자아낸다.



<대중문화 영성과 기독교 영성>에서 저자는 대중문화에도 영성이 있으며, 기독교의 영성으로 대중문화 영성의 한계를 뛰어 넘어 대안을 제시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 주장의 면면을 자세히 살펴보자.



첫째, 대중문화에도 영성이 있다는 저자의 생각은 참 신선하다. 흔히 사람들은 대중문화는 영성과 반대편에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저자는 영성을 “의미경험”으로 이해하는데, 이 생각의 근거는 뇌과학자들인 도나 조하와 이안 마셜, 그리고 빅터 프랭클로부터 왔다. 조하와 마셜은 영성이란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신비한 어떤 것이 아니라 지금의 객관적인 상황을 초월해서 새로운 차원으로 볼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즉 현재의 자기 자신과 환경 너머를 보고, 현실을 뛰어 넘어 의미와 가치를 찾는 능력이다”라고 영성을 정의했다 (<SQ 영성지능>, 7). 프랭클은 치료에 있어서 의미경험의 중요성을 밝히고 의미경험이 종교와 깊은 상관관계가 있다고 주장했다. 이를 바탕으로 저자는 “의미경험은 종교경험의 세속적인 형태다”라고 결론을 짓는다 (53). 저자가 보기에, 사람들이 문학, 음악, 영화, 만화, 광고 등 대중문화에 열광하는 이유는 의미경험 때문이다. 여기에서 의미경험이 내포하는 것은 세 가지인데, “첫째, 새로운 경험을 통해 삶의 의미를 얻고자 하는 노력, 둘째, 소비를 통해 정체성을 확인하고 의미를 경험하려는 노력, 셋째, 심신치료 (치유, 회복을 통한 전인주의)에 대한 갈망” 등이다 (48).



둘째, 저자는 대중문화에 대해 기존의 관점보다 좀 더 포괄적이고 균형 잡힌 시각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을 잘 보여주는 예가 뉴에이지에 대한 이해이다. 저자는 “영성에 대한 대중적인 추구와 인간의 잠재력을 계발함으로써 영성을 다양하게 소통하려는 모든 노력을 뉴에이지로 규정”하는 기존의 노력들에 찬성하지 않는다 (80). 그래서 비기독교적이고 반기독교적인 정서를 갖는 모든 작품을 뉴에이지로 규정해버리는 시도는 뉴에이지에 대해 지나치게 민감하게 반응한 결과라고 주장한다. 모든 반기독교적이고 비기독교적인 대중문화를 단순하게 뉴에이지의 우산 아래에 집어 넣어 이해하는 것보다는 대중문화의 영성이 더 크고 근본적인 주제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은 무척 중요하다. 다른 한편으로, 저자는 대중문화를 포괄적으로 보면서 동시에 대중문화의 한계를 놓치지 않고 있다. 그 한계는 국가와 종교로부터의 통제의 가능성, 인간의 탐욕을 자극하는 방향으로 흐를 가능성, 대중매체가 자본가와 권력가들에 의해 조정될 가능성, 그리고 다원주의적 세계관을 전파함으로써 기독교인들의 절대적 세계관을 상대화시킬 가능성 등이다.



셋째, 저자는 대중문화의 영성을 대하는 한국 기독교의 현주소를 잘 파악하여 분석해주고 있다. 가장 중요한 지적은 현재 한국 기독교가 대중문화의 영성에서 추구하는 것과 비슷한 추구를 하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실제로 하나님 경험이 의미 경험으로 축소되어 깨달음을 넘어서 삶의 변화까지 나아가지 못하는 기독교의 모습을 설교, 교육, 예배 등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저자는 이런 신앙생활이 결국 의미경험을 소비하는 대중문화의 영성과 무엇이 다른가라는 진지한 질문을 한국 기독교인들에게 특히, 기독교 신학계에 하나의 과제로서 던지고 있는 것이다.



연장선상에서, 저자는 현대 한국 기독교가 대중문화의 매개체인 대중매체에 의해 소비되고 있는 현실을 비판적으로 주목한다. 먼저, 기독교가 방송, 영화, 신문, 잡지 등 대중매체를 폭넓게 사용하고는 있지만, 그 결과 복음이 올바로 전달되며 열매를 거두고 있는지를 성찰해보아야 한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예를 들어, 자본력을 갖춘 교회의 예배나 설교 중심으로 프로그램이 편성된다면 그것은 분명히 복음의 다양성을 훼손하고 중소 규모 교회 구성원들에게 열등감을 부추기는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도 있을 것이다. 또, 방송을 통해 전달되는 예배나 설교가 청중의 삶을 변화시키기 보다는 그 순간의 의미경험으로 소비되어버리는 측면이 있지 않는가 하는 질문은 정확한 통찰로 보인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대중문화 영성이 의미경험을 넘어서서 대체종교의 형태로 받아들여지는 것을 막는 것이 기독교 신학의 과제이며 이를 위해 기독교 영성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이를 위해 저자는 기독교 영성의 정의를 내리고, 기본영성으로서 선교적 영성이란 개념을 소개하며, 마지막으로 복의 신학을 전개한다. 기독교 영성의 정의에 관해서는 저자가 여러 곳에서 여러 가지 표현으로 묘사하는데, 아마도 다음의 정의가 가장 저자의 생각을 잘 요약하는 정의라는 생각이 든다: “영성은 하나님에 의해 주어지는 복으로서 삶의 능력이며, 성도들을 이끄시며 함께 하시는 성령의 사역에 따라 형성되는 것이고, 또한 하나님 경험을 준비하고 또 가능하게 한다는 점에서 하나님의 능력이다”(152-3). 이 정의에 표현된 “하나님의 능력”을 저자는 다섯 가지로 부연 설명 한다: (1) 하나님의 사역을 인식할 수 있는 능력, (2) 수용 능력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 머무르며,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함으로써 하나님의 사역에 참여할 수 있는 능력), (3) 분별력 (자신과 세상의 의지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는 능력), (4) (언어적, 예술적) 표현 능력, (5) 기도의 능력 (자신이 피조물임을 인정할 수 있는 용기, 하나님을 신뢰하는 능력, 하나님을 기대하고 소망하는 능력). 저자가 기독교 영성의 정의를 내린 후에, 소개하는 기본 영성으로서의 선교적 영성에 대한 내용과 복의 신학에 대한 부분은 설득력 있게 논리적으로 통찰력이 주는 감탄으로 다가오기 보다는 오히려 많은 질문을 품게 했다. 이 의문들은 조금 후에 다루는 비평과 연결 된다.



이상에서 간략히 <대중문화 영성과 기독교 영성>에서 설파된 저자의 주장을 요약했다. 필자는 저자의 문제의식에 공감하며 해결하려는 방향에 동의한다. 저자가 주지한대로 대중문화는 영성적 측면이 있으며 기독교인들이 그것을 인식하고 있어야할 뿐만 아니라 기독교 영성이 대중문화가 제시하는 의미경험 이상의 대안을 제시할 수 있다는 것을 영성훈련을 통해 경험해야 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 책에서 몇 가지 아쉬운 점들이 있다.



첫째, “영성”에 대한 이해는 좀 더 연구와 보완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4장에서부터 펼쳐지는 기독교 영성에 대한 저자의 설명은 필자가 보기에 기독교 영성을 학문적으로 설득력 있게 잘 정리했다고 할 수 없다. 먼저, 영성의 정의가 혼란스럽다. 저자는 대중문화의 영성이라는 개념을 통해 “영성”이 단지 종교 안에서만 쓰이는 개념이 아니라 좀 더 포괄적으로 사용될 수 있는 개념임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대중문화의 영성에서 사용된 “영성”과 기독교 영성에서 사용된 “영성”이라는 개념의 정의가 달라서 혼란을 가중시키는 듯한 느낌이 든다. 사실 저자는 이것을 해소할 수 있는 기회를 포착할 수 있었다. 기독교 영성학자인 샌드라 쉬나이더스의 영성에 대한 정의를 참고하는 것이다. 쉬나이더스는 영성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인식된 궁극적 가치를 목표로 하여 자기 초월을 통한 삶의 통합 프로젝트에 의식적으로 참여함으로써 얻는 경험”(the experience of conscious involvement in the project of life-integration through self-transcendence toward the ultimate value one perceives). 이 정의를 대중문화에 적용한다면 대중문화가 지닌 영성적 측면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아이돌 가수를 좋아하는 한 중학생이 있다. 그 학생은 아이돌 가수의 이미지를 자신의 궁극적 가치로 삼고 그 것을 추구하는데서 삶의 의미를 발견한다. 아이돌 가수를 사랑하고 닮기 위해 노력하는 가운데, 팬클럽을 형성하는 구체적인 실천에 나서다가, 자신의 열등감이나 낮은 자존감을 극복하고 초월하는 경험을 할 수도 있다. 이것이 대중문화의 영성적 측면이다. 위의 정의를 기독교에 적용하면, 한 기독교인이 궁극적 가치인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예배에 참여하고 영성훈련에 참여하는 가운데 어떤 사람에 대한 미움을 극복하고 초월해서 용서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지니게 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이것이 기독교 영성적 경험의 한 예이다. 실제로 저자가 쉬나이더스를 참고하긴 했지만, 그녀가 내린 영성의 정의를 깊이 고찰하지 않고, “영성은 정말이지 정의하기가 쉽지 않다”만 인용하고 만 것은 (138) 정말 아쉬움을 남긴다.



둘째로, 저자가 이 책에서 영성의 의미를 너무 축소시킨다는 느낌이 든다. 영성을 “능력”과 “복”이라는 말과 연관 지어 설명하는 부분에서 그것이 강하게 나타난다. 저자는 “능력”이란 표현을 과도하게 사용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서 잠시 책의 한 부분을 인용해보자. “한편, 양들에게는 특별한 능력이 있다. 양떼를 몰고 가는 목동 이외의 다른 사람이 피리를 불면 전혀 움직이지 않다가도 목동이 피리를 불면 움직인다. 양들에게는 목동의 피리 소리를 분별할 수 있는 분별력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173). 목동의 피리 소리를 분별하는 것이 “특별한 능력”인가? 영성생활이 하나님의 능력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점은 맞지만, 영성생활에서 경험하는 모든 것들에 능력이란 말을 굳이 붙일 필요가 있는가하는 의구심이 든다. 이는 자칫 “능력을 받아야 한다”고 강조하는 은사 중심의 영성만을 주목한다고 오해받을 소지가 있기 때문이다. 또, 저자가 복과 영성을 비교하는 부분에서도 영성에 대한 협소한 이해를 엿볼 수 있다. “영성은 능력이라는 점에 제한되지만, 복은 능력 이외에 능력으로 사용되는 조건에서 세속적인 가치와 풍요로움을 포함한다는 점에서 영성보다 더욱 포괄적 개념이다” (297). 복이 영성보다 더욱 포괄적이라는 표현에 담긴 영성에 대한 이런 협소한 이해는 영성을 “능력”이란 개념에 묶어놓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저자가 이 책에서 복의 신학을 상술하는 목적은 선교적 영성의 중요성을 강조하려는 것이다. 선교적 영성에 대한 강조와 집착이 영성에 대한 이해를 오히려 축소시키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마지막으로 이 책에서 아쉬운 점은 영성훈련에 대한 이해가 피상적이라는 것이다. 먼저, 대중매체를 영성훈련에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해주지 않는다. 기독교 영성이 대중문화 영성의 대안을 제시하려면 그 구체적인 방법론으로서의 영성훈련이 당연히 중요하다. 그러나, 에필로그에 담긴 영성훈련에 대한 짧은 항목에서도 원론적인 언급 외에 실천할 수 있는 구체적인 영성훈련에 대한 사항은 찾기가 힘들다. 또 대중매체를 영성훈련에 활용하는 방법도 이 책의 취지와 관련해서 다뤄볼만한 주제인데 전혀 언급되지 않고 있다. 다음으로, 영성훈련의 핵심인 기도와 관련해서, 묵상과 관상에 대한 이해가 피상적이며 너무 가볍게 처리한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다음의 인용문이 그 예이다: “묵상은 하나님의 말씀과 행위의 의미를 풍부한 은유 (맛보고 만지고 보고 듣고 냄새 맡을 수 있는 오감적인 언어)와 더불어 음미하는 것이다. 관상은 생각 속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경험하는 것이다” (183). 묵상과 관상은 이렇게 한 줄로 요약되기에는 너무도 많은 전통과 다양한 이해가 있다. 차라리, 묵상과 관상에 대한 영성가의 정의를 인용하는 것이 안전할 것이다.



필자의 유학시절에 있었던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소개하며 글을 마칠까 한다. <기독교 영성사> 수업 시간이었는데, 어느 날 한 학생이 “스포츠와 영성”이라는 제목으로 발제를 했다. 그 학생은 석사과정을 미식축구로 유명한 노틀담 대학에서 했는데, 미식축구 시합을 전후해서 벌어지는 일들이 무척 종교적이라는 점에 착안한 발제여서 모든 사람의 흥미를 자아냈다. 시합 전에 일종의 출정식, 시합 도중에 선수들과 관중들이 경험하는 카타르시스, 캠퍼스 곳곳에 세워진 유명한 감독들과 선수들의 상징물들과 그들에 대한 사람들의 존경심 등등. 그런데, 발제가 마친 후에, 교수가 얼굴이 붉어지며 갑자기 유에스씨 (USC, University of Southern California) 교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유에스씨는 노틀담 대학과 미식축구 맞수인 학교였다. 발제했던 학생도 자기 학교 교가를 부르며 이에 맞서는 모습을 보며 모두들 폭소를 터뜨렸다. 스포츠와 영성이 얼마나 밀접한 관계가 있는지를 피부에 와닿게 경험한 수업이었다. 그러고 보니, 한국인들의 스포츠에 대한 열광은 가히 종교적이다. 특히, 2002년 월드컵은 이런 관점에서 역사적인 획을 그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일들을 떠올리면서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대중문화의 영성과 기독교 영성>의 저자는 왜 스포츠에 대해 한 마디도 언급을 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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